필리프 프티(Philippe Petit, 프)는 1974년 8월 7일 뉴욕의 세계 무역 센터의 쌍둥이 타워를 외줄을 이용하여 건넌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두 건물 사이에 연결된 줄을 긴 장대 하나를 의지하여 건넜다. 사람들은 가슴을 졸이며 그 장면을 보았고 성공했을 때 환호했다. 그 후 그는 세계의 고층 빌딩들에서 외줄을 타고 건넜다. 그가 허공에서 외줄을 타고 건널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긴 장대 덕이다. 그는 장대를 이용하여 허공속 외줄 위에서 몸의 균형을 잡았다. 줄타기는 균형의 힘이 극대화되는 현장이다.

신앙에도 균형이 필요하다. 신앙의 균형은 지정의다.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는 것은 두뇌를 자극하는 지적영역이다. 기도하고 묵상하고 찬양하는 것은 가슴을 자극하는 정적영역이다. 손과 발로 순종하는 것은 의지적 영역이다. 이 세 가지는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배우고 기도는 하는데 행동이 없으면 언행불일치 신앙이 된다. 가슴이 유난히 앞서가는 신앙은 자극적인 신비주의에 빠질 염려가 있다. 앞 뒤 안 가리고 행동부터 하고 보는 신앙은 실수와 실패가 많다. 이 균형은 경건의 영역에서도 필요하다. 즉 혼자 있을 때와 공동체로 있는 영역이다.

혼자 말씀보고 기도하는 것만큼 어울려 예배드리고 사귀고 봉사해야 한다.

하나의 균형을 더하고 싶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균형이다. 하나님의 대표적인 두 가지 속성은 사랑과 공의이다. 사랑은 죄인인 우리를 구하기 위해 외아들 예수님을 죽게 하신 것이다. 공의는 죄인 된 인류의 죄 값을 자기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받으셨다는 것이다. 이 두 개의 속성이 만난 것이 십자가 사건이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과 공의가 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사람들의 인식이 균형적이지 못 할 때이다. 즉,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에만 좋아한다. 그래서 잘못에 대하여 용서와 용납, 덮음만을 좋아한다. 잘못을 말하는 사람에 대하여는 사랑이 없다고 하고 하나님이 판단하실 것이기에 사람들은 기도만해야 한다고 한다. 틀린 말이 아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맞지 않다. 공의와 정의는 잘못에 대한 바른 판단이다. 주님도 당시 말씀을 왜곡했던 기득권층에 대하여 매일 지적하셨다. 주님이 운동권인가? 아니다. 특별히 주님이니까 그러셨다고 하지 말라. 구약에 등장하는 수많은 선지자들이 외친 소리와 종교개혁자들이 소리도 있으니까. 그러나 공의에도 함정이 있다. 그것은 자기 의다. 하나님의 공의를 이야기 할 때 자기 의가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자기 의는 무서운 교만이다. 그 대신 안타까움과 아픔이 있어야 한다. 공의가 없는 사랑은 값싼 은혜에 불과하고 사랑 없는 공의는 전쟁과 같은 야만적 폭력이다.

봄이 시작되는 3월은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한다. 학업과 인생의 새로운 꿈을 꾼다. 그 모든 꿈의 설렘과 기대의 바탕적 에너지는 믿음이다. 이 믿음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해보자. 말씀과 기도, 행함의 균형을 가져보자. 영역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균형을 가져보자. 하나님에 대한 앎도 균형을 잡아보자. 균형이 있으면 건물과 건물사이, 절벽과 절벽사이의 허공처럼 힘든 환경에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균형 있게 믿음의 장대를 잡고 내게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는 한동인들 한학기가 되길 기도한다.

유인환(징검다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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