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한 학생이 상담을 원해서 만나본 일이 있다. 얘기를 들어보니 공부할 의욕을 잃었다는 것이다. 갑자기 이걸 왜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 납득할만한 해답을 못 찾겠다는 것이었다. 몸이 피곤해서 그런 것도 아니라고 했다. 선배나 친구를 찾아가서 얘기도 해 보았단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반 학기가 지났지만 휴학을 하고 좀 쉬면서 생각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집에서 책도 읽고 여행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좀더 근본적인 문제도 생각해 보라고 권했다. 도대체 내가 왜 살아야 하는 건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한번 진지하게 고뇌해 보라고 권했다. 그래서 그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학생들에게 조금이나마 참고가 될까 해서 나의 경험을 토대로 몇 자 적어 보고자 한다.
사람마다 그러한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것이 때는 각각 다르지만 다 있는 것 같다. 파스칼은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의 공간 즉 공백이 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마음속에 공백이 있다.”고 말한다. 나도 사춘기 이후 그런 공백을 느꼈던 것 같다.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경쟁하면서 힘들게 재미없는 삶을 꼭 살아야만 하는가? 라는 의문이 생겼었다. 왜 사는가? 하는 질문은 짧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그리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나그네 길 같은 인생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가 일반 사람에게는 생각보다는 쉽게 알아지지 않는 것 같다. 얼마 전 어느 스님에 관한 기사를 읽은 것이 생각이 난다. 그 스님은 수양을 하느라 젊었을 때 손가락 세 개를 태우기까지 해보았다는 것이다.
나도 만족할만한 답을 얻기까지는 상당한 방황이 있었고 시간이 걸렸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 시작하게 된 교회생활에서 한참 후에 다가 온 말씀 중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의미가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 즉 영광을 위해서 태어난 것이고 그러므로 그것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논리가 그 어떠한 설명보다도 내게 의미가 있게 느껴져 왔다. 삶이라는 게 그런 거라면 한번 살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생명이나 모든 육의 세계가 무에서 우연히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즉 영의 세계로부터 창조되고 죽어서 다시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나라 즉 영혼세계의 차원으로 돌아간다는 논리가 마음에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하는 동안에는 일단 삶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하고 대신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문제와 씨름했었다. 어렸을 때는 전통적인 유교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가르침을 받아 들였다. 이것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세상적인 부와 명예를 자연스럽게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이웃 사랑)를 구하라.”라는 말씀을 접하게 되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에게 다가가셔서 치료해 주시고 친구가 되어 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죄와 악으로 물들어 가는 세상을 사랑과 희생으로 회복시키시는 삶을 따르는 데로 삶의 방향이 점차 바뀌게 되었다. 세상적인 부와 명예보다는 나눔과 섬김이 삶의 푯대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신 단순한 말씀이 삶을 고뇌하는 한동의 젊은이들에게 해답이 되었으면 좋겠다.

경영경제학부 안세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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