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과거 어느 때보다 과학과 기술, 물질적인 면에서 진보를 이루었지만, 정신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점점 퇴보하고 있는 것 같다. 유럽 대학생의 25%, 미국 대학생의 60%가 ‘내면의 공허’ 또는 ‘실존적 공허’를 느끼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대학생의 절반정도도 우울증을 앓은 적이 있으며, 10명중에 3명은 자살충동을 느껴본 적이 있다. 미래의 희망을 잃고, 게임중독과 알코올 중독에 빠져드는 청소년들이 늘어가는 수치를 감안한다면, ‘불안의 시대’로 불리웠던 20세기를 넘어서서, 21세기는 ‘우울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왜 물질적인 풍요로움 속에서도 우울한 현대인이 늘어가는 것일까?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인간을 새는 물병에 비유한 적이 있다. 아무리 채워도 만족하지 않는 인간의 단면을 지적한 것이다. 또한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는 “만일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하고 심판하신다면 그것은 질병이나 실패나 죽음이 아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어지지 않는 불신앙으로,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는 막힌 귀로, 감사하지 않는 메마른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제 추수감사절이 얼마남지 않았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1863년 남북 전쟁의 분수령이 된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청교도들이 지켜왔던 추수감사절을 미국의 국경일로 선포했다. 1620년 오직 신앙의 자유를 찾으려고 했던 청교도 35명과 67명의 다른 이주자들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11월 10일 메사추세츠 케이프가드에 도착했다. 이들 102명중에 절반정도가 첫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일행 중 건강한 사람이 6-7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심한 고통 속에 있던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것은 토착민인 인디언들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스콴토라는 인디언이 있었고, 인디언들은 옥수수 등의 곡물을 가져다주고, 농사짓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그해 가을 첫 수확을 거둔 1621년 11월에 마사소이트 추장과 90명의 인디언을 초대해서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고 도움을 주었던 그들과 함께 나눔의 축제를 가졌다. 옥수수와 칠면조 고기 등을 함께 먹는 전통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생존과 수확의 기쁨의 근원엔 그들이 드린 더 깊은 감사의 이유가 있었다. 메사추세츠만 식민지 총독이었던 윈스럽(John Winthrop)은 “기독교 사랑의 모범(a model of christian charity)”라는 설교는 청교도 공동체와 하나님의 언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청교도들의 입장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총으로”, “오직 하나님의 면전에서”라는 네 가지 삶의 원칙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들은 언덕위의 도시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건설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책임을 물으실 것이라는 생각했다. 후에 프랑스의 역사가인 토크빌은 신생국가인 미국의 성장의 비결은 청교도 정신에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감사는 개인과 공동체가 함양해야 하는 소중한 덕목이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처럼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 주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감사의 마음과 신앙이 우울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한동대학교의 모든 구성원에게 회복되기를 바란다.

교목실 김기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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