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에 고함’ 이라는 거창한 제목이 되려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한동 공동체에 쓰는 글에 자극적인 제목이나 소재를 이용해서 관심을 끌고 싶지도 않았고 겸손한 태도로 신중하게 쓰고 싶었습니다. 제가 겪지 않은 일에 대해서 알고 있는 양 이야기를 하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할 수도 없지요. 제가 겪어본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자존감’ 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면 눈을 잘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눈을 마주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가 아니었어요. 눈을 맞추면 지금 이야기 하고 있는 사람이 내 얼굴을 쳐다볼 테고, 나는 남에게 내 얼굴을 자랑스레 내어놓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내 외모에 만족하지 못했거든요. 항상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온데다가 감사하게도 일탈을 꿈꿀 만큼의 깡도 없어서 제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절제하는 것에 있어서는 아주 기가 막히도록 잘했죠. 진짜 속이 착한 사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착한 학생으로 행동하며 살아오는 것에 있어서는 아무 문제 없었습니다. 또한 갑작스레 닥쳐온 어려운 상황들이 저를 그 길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아마 없었겠지만, 혹시라도 있을까 말까 한 일탈이라는 싹이 있었다 한들 그 싹 조차 잘라 내어졌습니다. 또한 내 앞 길은 신기할 정도로 내가 계획한 것과는 다르게 가는지… 조금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정반대로 가는 적도 많았고요. 목표로 했던 것에 대한 실패, 인간 관계 속에서의 거절, 내 잘못이 아님에도 남을 위해 덮어쓰고 발 빠져야 했던 일들이 반복 됨에 따라 저는 주눅들게 되었습니다. 세상적으로 좀 더 멋진 사람들을 내 곁에 두는 것을 통해서, 혹은 외모를 가꾸는 것을 통해서 자존감을 높이려고 노력도 많이 해봤습니다. 그것도 정말 열심히. 하지만 전부 잠깐의 위안일 뿐 진짜로 제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어주지는 않았습니다.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만든 조건들은 모두 진짜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운동을 해서 몸을 만들고 그로 인해 자존감을 가졌다면, 더 멋진 몸을 만든 사람 앞에서 작게 느껴지기 마련이듯 말이지요. 나 자신 역시 부모님께 사랑 받는 아들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라고들 이야기하지만 부모님의 사랑이 제 외모를 제가 원하는 만큼 멋진 모습으로 바꿔주는 것도, 제가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게 해주는 것도 아니니 자존감을 높이는 것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지금 저는 학교를 떠나 전혀 다른 곳에 나와있습니다. 이곳에선 제가 내세울 수 있는 것들, 즉, 그나마 갖고 있던 자존감을 지탱해주던 조건들을 내세우기 쉽지 않은 환경입니다. 되려 지금에서야 조건을 통해서 얻은 자존감은 상대적인 것이고, 그러한 자존감은 진짜 나 자신을 아끼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지금 저는 남과 비교하여 상대적인 내 모습이 아니라 진짜 내 모습 그대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또한 내가 내 모습이 아니라 생각했던 모습들, 그것이 설령 진심이든, 그렇게 행동하기 위해 꾸며낸 ‘척’ 이든 결국은 내가 살아온 삶이고 내 모습 그 자체라는 사실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을 많이 해왔습니다. 조금 늦었지만, 이제 제 자신 역시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랑 받아야 할 존재라는 사실 역시도 받아들이기로 했고요.

안바라 기계제어공학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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