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은 유난히 더워 숨쉬는 것 조차 답답했었는데 어느새 10월이 되어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분다. 몇 일 전 요즘 우울하고 힘들다는 학생과 캠퍼스를 걸었던 적이 있다. 학생은 자신이 늘 말씀과 기도생활을 잘 하다가도 금새 기쁨과 평안도 사라지고 학업과 친구들과의 관계도 힘들고 신앙적으로도 메말라간다며 자신의 나약함과 영적 게으름을 자책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들이 어찌 그 학생만의 고민이요 괴로움이었을까? 나 자신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되풀이하며 겪고 있는 일생에 고단함과 어려움일 것이다. 학생을 보내고 채플을 지나가며 습관처럼 최지성 목사님의 유골이 묻혀있는 나무를 보았다. 아, 최 목사님이 돌아가신 지 벌써 1년이 되었구나. 그러고 보니 지난 1년동안 신앙적으로나 여러 가지 내 인생에 가장 힘이 되었고 사랑했던 두 사람이 내 곁을 떠나갔다. 한 분은 한동에서 10년이상을 함께 한 최목사님이었고 또 한 분은 지난8월 개강 직전에 돌아가신 내 아버지다.

이 두 분 을 생각하면 시편1편의 시냇가에 심겨져 여느 인간들처럼 모진 비 바람을 겪고도 그 뿌리를 깊이 내려 종국에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며, 힘겹지만 꿋꿋하게 자신의 달려갈 길을 간, 주님이 말씀하신 그 복 있는 사람이 떠오른다. 시간과 여건은 달랐지만 이 두분에게 사역자로써 주님의 부름을 받고 설렘과 굳은 결심으로 시작한 목양의 길은 참으로 고생스럽고 힘겨운 것이었다. 내 아버지는 20대 청년시절 목사 안수를 받으시고 당시까지만 해도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거제도에서 전쟁 고아와 피난민을 대상으로 천막교회를 섬기셨다. 그곳에서의 시간은 참으로 감사하기도 한 단련의 시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아무리 의욕에 찬 젊은 목사라 할지라도 힘겹고 고달픈 외로운 시간 이었다. 이후에도 아버지는 농어촌 교회들을 개척 하시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 속에서 일평생 사역하셨고 특히 교도소 수감자들, 윤락녀들을 다시 사회로 복귀시키는 일에 열정을 쏟아 부으셨다. 그 과정에서 경제적으로도 계속 힘드셨지만 온갖 협박과 수모도 많이 받으셨다. 자라면서 나는 사는 게 참 고생스러운 아버지를 지켜보며 왜 하나님은 성경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좀 형통하도록 도와주시지 않는 것인지 질문 했었던 것 같다.

최목사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난 목사님을 지켜보며 “ 아…, 목사님이 많은 고생을 하시면서도 아버지께 절대 순종하는 삶을 사셨으니 이 힘든 시간이 지나고 언젠가 좀 더 나이가 들어 은퇴 하시면 함께 놀러도 다니고 쉴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일찍 목사님을 데려 가셨다. 그것도 힘든 병상 생활 후에 말이다. 마지막으로 중환자실에서 보았던 최목사님은 본래의 모습을 전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야위어 뼈만 앙상했었다. “왜 하나님은 평생동안 그토록 당신을 사랑하며 힘들게 사역했던 딸의 마지막까지 저런 고통속에서 그것도 처참한 모습으로 데려가셔야만 했을까?” 나는 한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그 깊은 뜻을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은 참 복잡했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내 마음속에 하박국 3장17-18절 말씀이 떠올랐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나는 이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하며 주님이 말하시는 복 있는 사람이란 과연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주님이 말씀하신 복있는 사람은 어려운 상황속에서 인간적으로 고뇌하고 힘들어할지라도 주님 앞에 고개 숙이며 감사와 기쁨의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러한 믿음을 갖길 원하시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콘텐츠융합디자인학부 김성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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