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톡신자”란 성경을 전혀 읽지 않아 수북하게 먼지를 교회에 올 때마다 톡톡쳐서 먼지를 털어내는 사람을 지칭하는 은어이다. 종교개혁 이후 라틴어로 강론되던 성경은 자국어로 읽혀질 수 있게 되었다. 인쇄기술이 발달한 이래로 누구나 성경을 소장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도 성경을 한 번도 읽지 않은 청년들이 너무 많다.
성경을 전혀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중세의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의 역사에서 뚜렷하게 오점으로 남는다. 지금도 이슬람교도들은 서방세계에 대한 태러활동의 정당성의 역사적 근거로 십자군 전쟁을 인식한다. 반면에 일부 크리스천들은 성전(holy war)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세계사를 살펴보면, 십자군 전쟁의 발생배경은 비잔틴을 공격해왔던 이슬람 제국의 팽창주의와 기독교 세력의 충돌, 영토획득에 대한 욕망, 약탈에 대한 소망, 모험주의 등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황의 잘못된 종교적 선동이다. 영생의 면류관, 세금의 면제, 면죄부를 받는다는 약속에 선동되어 약 200년간 그 전쟁은 지속되었다.
우리는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첫째, 십자군 전쟁은 원수까지 사랑해야 하며, 검으로 일어선 자는 검으로 망하기 마련(마26:52)이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지킨 사도들의 교훈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에서 결코 성경적이지 않다. 둘째, 기독교 사상사에서 정립된 정의전쟁의 원칙에도 부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다. 로마의 위기의 시대를 살았던 어거스틴은 정의전쟁 교리를 “전쟁을 위한 정의(justice for war)”와 “전쟁 중의 정의(justice in war)”로 가르쳤다. 전자는 타국을 정복하는 욕망의 전쟁(wars of desire)을 금지하며, 방어적 전쟁인 경우에도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수단들만을 사용하게 한다. 후자는 ‘비례규칙’과 ‘차별규칙’으로 나뉘는데, ‘차별규칙’은 군인이 아닌 민간인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규칙이다. 당연히 패전국의 시민들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이 점에서 어거스틴의 정의전쟁의 규정을 확실하게 어긴 것이다.
왜 200년간 처참한 전쟁의 집단광기에 빠지게 되었을까? 한마디로 교황도, 참전자도 성경을 몰랐기 때문이다. 당시 많은 이들은 교황의 종교적 선동에 “신의 뜻”이라고 환호했다. 하지만, 실상은 반대이다. 대부분은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당시는 성경을 라틴어로 강론했으니 전혀 알아 들을 수 없었고, 자국어로 번역되어 있지 않으니 더더욱 그렇다. 한마디로 종교적 선동을 검증할 성경적 지식이 없어서, 자기들이 그리스도의 군사(딤후2:3)인줄 착각했지만, 세속적 동기를 가진 용병으로 이용당했던 것이다. 역사에 가정법이 통하지 않지만, 만일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만일 성경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잘못된 선동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오직 성경,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목표를 가진 종교개혁은 더더욱 의의가 깊다. 성경을 모른다면, 그리스도의 군사가 아니라, 용병으로 사는 것이다. 21세기를 사는 한동의 청년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을 모르는 톡톡신자라면, 더 많은 연봉과 명예를 얻는 성공신화(?)를 추구하면서도 자신을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착각할 수 있다. 인생의 석양이 지기 전에, 자신의 비전과 인생의 목적을 성경으로 점검해야 한다. 인생을 헛되이 낭비하는 용병이 되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연구해야 한다. 성경은 창조주가 주신 인생지침서이며,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먼지를 털어내는 톡톡신자가 아닌, 성경의 사람, 비전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김기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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