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s University’, 현동홀 앞 이 문구가 내 돌을 한동대학교 위에 놓게 했다. 물론 ‘God’s’의 정의를 섣불리 내릴 수는 없겠지만, 나는 그 때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끌어안고 학문의 장에서 치열하게 고민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의 한동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그 뒤로 정말 좋은 교수님들과 학생들을 만나게 해 주셨다. 어디에나 좋은 사람들은 있지만, 그 사람들을 모아 놓은 곳은 사실 찾기 쉽지 않다. 그리고 스스럼없이 함께 고민을 나누고, 기도하며, 나아갈 바를 찾을 수 있는 곳은 더더욱 그러할 터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한동 이후의 삶은 내게 더 풍성한 감사의 조건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개인 대 개인으로의 풍성함과는 별개로, 한동에서의 삶 초반부터 알 수 없는 갈증이 느껴졌다. 갈증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답답함에 처음 몇 년간 채플을 드릴 때마다 울기도 많이 울었던 것 같고, 어디서부터 기인한 것인지 찾기 위해 고민도 참 많이 했다. 그리고 내 고민의 손끝에 닿은 것은 ‘God’s University’의 실체에 대한 정의의 부재라고 적혀 있는 큰 바위였다. 혹자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네 개인의 문제라고, 네가 지나치게 예민한 것이고, 네 부족함에 스스로 찾지 못하는 문제일 뿐이라고. 그 말이 맞다. 나는 부족하고, 내가 찾지 못해 고민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예민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처음 한동에 내 돌을 놓게 했던 이유이자, 다시 길을 가기 위해 반드시 깨야 할 바위였기 때문이다.
조직 이론에서는 조직 규모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조직 그 자체가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고 말한다. 그 때부터는 조직구성원이 조직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이라는 거대한 생명체가 굴러가며 조직구성원을 통제하게 된다. 만약 이 때 조직이라는 생명체가 스스로의 존재 이유와 방향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면, 향후 이 조직은 방향성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리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일단 생명력을 가지게 되면 방향성에 대한 힘의 주도권은 이미 조직구성원들에서 조직으로 넘어가 있는 상태이므로, 그 구성원들이 나중에 방향을 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해도 그 영향력은 사실 크지 않다고 봐야 한다. 성경의 욥기 41장에서도 하나님께서 리워야단-Leviathan, לִוְיָתָן(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바 있다. 후에 사람들이 리워야단의 개념을 인간이 만들었으나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인간이 통제할 수 없고 손 댈 수 없는, 그래서 인간을 부품화시키는 어떤 존재로 해석한 바 있다. 한동 역시 또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이다. 한동의 구성원들과는 별개로 한동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그에 기반하여 앞으로 살아갈 방향성과 원동력을 얻어야만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한동은 현재 어떠한가? 이미 리워야단이 된 것은 아닌지 두려운 마음으로 자문해야 하지 않을까?
청년 한동, 만 21살을 훌쩍 넘긴, 이제 갓 성인이라는 딱지를 떼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시작할 나이. 존재의 이유와 방향성을 찾아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해야 하는, 그래서 예측불허의 인생의 방향에 대한 조그만 조각이라도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젊은이들의 시절을 한동이 지나고 있다. 한동의 귀한 청년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너의 존재를 확인하여 바른 자아정체성을 찾고, 나아갈 바를 고민하라고 얘기한다. 그렇다면 청년 한동에게도 같은 질문을 해야 하지 않을까. 더욱이 한동이 ‘God’s’를 얘기하고자 한다면, ‘과연 그러한가’에 대한 물음과 점검에 지나침이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자체 생명력을 가진 한동이 혹 거대한 괴물이 되어버리지 않도록, 너무 늦기 전에 끊임없이 되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경영경제학부 라채원 교수
- 기자명 한동대학교학보사
- 승인 2016.09.13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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