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풋내기, 아니 아직 사회에 발을 들였다고도 할 수 없는 내가 단지 학내 이슈가 아닌, 사회적 현안으로도 볼 수 있는 사안을 취재했다. 어려웠다. 취재하면 할수록, 더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볼수록 나의 무지와 무심을 처참하게 깨닫는 순간들이었다. 한 사안에 대해 여러 주체가 저마다의 입장과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절박하고 힘들었다. 그들 각자가 마주친 문제들은, 마치 맞추기 어려운 퍼즐 조각들처럼 흩어져 있었다.
  그 퍼즐 조각들이 알맞게 들어맞았든, 억지로 끼워 맞춰졌든 간에 어쨌든 상황은 일단락됐다. 이 시점에서 많은 사람이 묻는다. “왜 여기까지 와야 했는가?” 이렇게까지 긴 싸움을 벌여야만 했을까.
  한동대 예산이 넉넉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교직원, 교수, 청소노동자에게 주는 임금이 나가는 교비는 한정돼 있으며 고정된 예산 안에서 청소노동자에 배분되는 임금을 충분히 마련하기란 쉽지 않다. 노동자들에게 돌아갈 임금이 교직원과 교수에게 편중된 것 아니냐는 요언들은 어쩌면 핵심에 다가가지 못하도록 하는 장벽일 수도 있다.
  취재하면서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청소노동자 한 명당 근로시간이 늘어나면서 1인당 임금이 늘어나므로, 한정된 전체 용역비 안에서 모두의 고용을 승계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한동대의 첫 번째 논리에 나는 사실 별 문제점을 찾지 못했다. 나는 그 속에서 ‘사람’을 생각하지 못했다. 한동대 청소노동자 한 명당 맡은 업무의 강도가 다른 학교들에 비해 평균 이상이라는 것을 한동대는 과연 알고 있었을까. 아니, 알려고 시도했을까. 이러한 상황에서 1인당 소정근로시간을 한 시간 늘렸다고 해서 청소노동자들 각각이 그만큼 일을 더 많이 할 것이며 그에 따라 인원을 감축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청소노동자들에게 기가 찼을 것이다.
  한동대는 청소노동자 세 명의 임금을 자발적 모금운동으로 충당한다는 것이 현재로써는 최선이라고 말했고, 이 부분에서도 역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후 당사자인 청소노동자와의 대화에서 이에 대한 입장을 들었을 때, 다시 한 번 내가 부끄러워졌다. 소통하려 시도했지만, 나 역시 그들과 눈을 맞추지 못했다.
  참 많은 일이 있었던 한 학기였다. 순탄하지 않았던 학기의 마지막 기사를 쓰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건 ‘소통’이라는 단어였다. 소통한다는 것은 쉬운 듯하나 어렵다. 대화하고 있지만, 서로의 눈높이가 다르다면 결국 각자의 말은 서로에게 전달되지 못하는 메아리가 될 뿐이다. 지나간 이야기를 꺼내 특정 대상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가 발견하지 못한 누군가의 숨겨진 노력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기에 글을 쓰는 지금도 내가 그 사람과 눈을 맞추지 못하고 있을까 두렵다. 다만,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나와 마주하는 사람과 눈을 맞추기 위해 더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이제는 조금만 더 귀를 기울이고, 더하여 눈을 맞춘다면 우리는 조금씩 서로에게 가까워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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