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은 나에게 간증과도 같은 영화다(이 글에는 영화<곡성>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흔들리던 신앙심을 바로 잡았기 때문이다. 나는 신앙에 정해진 답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답은 그때그때 하나님과 나의 1:1 관계 안에서, 내가 하나님께 계속해서 질문하며 찾아가는 것이라는 유동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영화에서 악마에게 현혹당한 사람들이 맞는 비참한 최후가 너무나도 무서워, 현혹되지 않기 위해 내가 붙잡을 흔들리지 않을 그 무언가, 즉 답으로 생각할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답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현혹되기가 너무나도 쉬웠기 때문이다. 내가 그때그때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대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악마가 준 생각이었다면 어쩌겠는가? 심지어 나는 그 생각이 하나님이 준 것인지, 정말 악마가 준 것이 확인할 능력도 없는 인간일 뿐이다. 그래서 애매하게 느껴질 때가 많아도, 성경이라는 답을 붙잡고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이 글은 평론으로 쓰지 않았다. 이 글은 나의 간증문이다.
 
 나는 대학생이라는 이미 머리가 어느 정도 세상의 것들로 채워진 상태에서, 나름의 논리적인 이유들로 스스로를 설득하여 개신교 신앙을 믿게 된 사람이다. 그럼에도 신앙심이 흔들렸던 건,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 신앙에서 답을 얻고자 했던 나의 시도가 빈번히 좌절됐기 때문이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은 성경의 전부가 아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절 성경은 취사선택 됐고, 이는 다른 성경 해석에 의해 종교가 나누어지는 과정에서 되풀이 됐다. 교인들 중엔 자기 맘 편하게 세상적인 관점을 교리에 적절하게 섞어 성경을 해석해버리는 사람도 적지 않았고, 그들은 극히 일부라 주장했지만 결코 적지 않은 빈도로 성직자들의 부패는 미디어를 통해 노출됐다. 신앙적 도움을 구하고자 하는 것들은 불완전했고 당연히 거기에서 완전한 답을 얻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영화를 두 번째로 보는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점에서 인생을 다 살아보고 다시 인생을 사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곡성을 두 번 봤다. 처음 봤을 땐, 관객을 현혹시키는 플롯에 갈피를 전혀 잡지 못했다. ‘황정민이 범인’이라는 스포일러를 보고 들어갔음에도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가 정말 나쁜 사람인지 헷갈렸으니 말이다. 두 번째의 관람에선, 영화의 내용을 모두 아는, 마치 전지적 존재가 되어 어느 대목에서 인물들이 자신들보다 힘센 존재인 신과 악마 사이에서 현혹당하는지를 지켜볼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영화는 두 번 볼 수 있지만 같은 인생을 두 번 사는 것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이다.

 영화는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인 신과 악마가 일하는 방식이 인간이 가진 논리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프로세스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렇기에 인간은 매 순간 너무나도 현혹당하기 쉬운 위치에 서 있을 수밖에 없고,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기에 악마에게 현혹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한들, 다시 돌아갈 순 없다는 것을 영화는 처참하도록 잘 표현해내었다. 영화가 제시하는 이 무시무시한 결말은, 악마의 현혹으로부터 나를 조금이라도 지키기 위해 그것이 모든 성경이든 부분적인 성경이 되었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이라는 답을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나는 이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당신의 생각이 궁금하다.

시네마테크 한동 언론정보문화학부 14학번 정하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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