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오십. 어느덧, 20대가 꺾였다. 부모님과 떨어져 지낸 지 약 6년째. 문득 삼시 세끼 챙겨 먹는 게 힘들다는 생각을 한다. 취업난인데 졸업하면 무엇을 할까,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 살아야 할 텐데, 걱정도 한다. ‘법정 근로시간 채워가며 아르바이트하고 살면 굶어 죽진 않겠지’ 따위의 말들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리고, 분노한다. 남들 나라는 최저임금이 높아 아르바이트만 해도 잘만 산다는데, 나의 나라는 최저임금이 6,030원. 현실이 벅차다.
 벅찬 현실을 체감하기도 전, 바로 옆에서 타인의 절절한 외침이 들린다. 그들은 다름 아닌 한동대 청소노동자(이하 청소노동자). 청소노동자는 최소한의 삶을 보장 받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그들의 요구는 ‘주 5일·40시간 근무를 채워 법정 근로시간에 맞춰 일할 것, 청소 외 업무를 요구하지 말 것, 점심 식비를 지급할 것.’ 이토록 당연한 처우를 휴게시간을 쪼개며 시위로 요구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눈앞에서 맞닥뜨린 처절한 현실에 놀람을 금치 못한다.
 감히 상상도 못 하겠다. 노동조합을 꾸리고, 협상에 나서고, 협상이 실패하고, 공문을 보내고, 보낸 공문이 거절당하고, 결국엔 쟁의까지. 위 수많은 단계에서 누구도 청소노동자의 근로시간, 청소 외 업무 금지, 점심 식비 요구에 단 한 번도 긍정적 답변을 주지 않았다. 딱딱한 법과 자본 앞에서 길게는 20년 동안 한동대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이 철저히 무시당했다.
 한동대는 청소노동자의 쟁의와 상관없이 청소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검토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한동대는 청소노동자와 직접 대화를 나누지는 않겠다고 말한다. 청소노동자는 법적으로 용역업체에 속해 있기 때문에 한동대와 대화할 것이 아니라고 이유를 설명한다. 즉, 한동대는 법적인 논리를 근거로 청소노동자를 대화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 청소노동자의 처우가 어떻게 개선이 되든, 그것은 한동대가 결정하는 것이지 청소노동자가 낄 자리는 없다는 것이다. 완벽한 배제다. 아, 싸늘하다.

 

‘한동스럽다.’ 이보다 불명확한 표현이 또 있을까. ‘한동스럽다’는 말이 하루에도 몇 번 오가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개인마다 다르다. 다름을 인지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한동대를 다닌 지 6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한동스러움의 의미가 뭔지 정확히 모르겠다.
 그럼에도 ‘한동스러움’을 어떤 의미로 해석하는지 묻는다면, ‘사랑’이라고 답할 것이다. “내 옆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한동대는 타 대학과 다를 바 없다”라고, 그렇게 답할 것이다. 마찬가지다. 청소노동자는 이웃이고, 이웃이 내 몸과 같이 사랑받아야 한동스럽다. 때문에 청소노동자의 처우개선은 한동대와 뗄래야 뗄 수 없다.
 혹 누군가가 ‘한동대’를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질문한다면, 당신의 한동대 안에는 청소노동자가 왜 없냐고 되려 질문 할 것이다. 혹 누군가가 한동대 재정이 악화되면 어쩔 것이냐고 질문한다면, 한동대 재정 악화를 왜 청소노동자의 손해로 메꿔야 하느냐고 다시 질문 할 것이다. 너무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이상적인 대답이 아니냐고 질문한다면, 그것이 ‘한동스러운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질문해 본다. 당신의 ‘한동스러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작권자 © 한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