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이름은 꽤 유명한 이름입니다. 화가 이중섭 씨 덕분에 포털에서 ‘나’라는 존재를 찾는 다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제게는 저라는 존재를 찾아주는 아주 특별한 단어가 있는데 바로 ‘한동’입니다. ‘한동’과 제 이름을 함께 입력하면 그제야 화가 이중섭이 아니고 ‘나’에 관한 이야기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한동’이라는 이름이 제게 중요한 이유입니다. 우리가 어떤 이름에서 떠올리는건 단순히 그 대상만은 아닐 겁니다. 물론 처음에는 특정한 대상을 지칭하는 언어적 표현이겠지만, 함께 나누었던 경험들과 시간이 쌓여간 후에는 그 이름은 그저 대명사로서가 아니라 몇 단어만으로는 표현하기 힘든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한동’, ‘한동인’이라는 말 속에는 학부생 때 함께 공부했던 동기들, 진심으로 섬겨주셨던 교수님들, 대학원생으로 연구원으로 함께 밤을 새우며 일했던 직원 선생님들, 교원으로 돌아와서 함께 섬겨주고 계시는 멋진 동료 교수님들 그리고 너무 소중한 후배이자 제자들…. 한동이 제게 진짜 한동다울 수 있는 이유는 이 사람들과 함께한 소중한 기억들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2년 전 교원으로 돌아와서 가장 많이 듣고 있는 말 중 하나가 ‘한동’이 변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얘기하는 변화가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변화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진짜 무엇이 변했는지 고민해 봐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동’이 변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한동인’이 변했다는 말일 겁니다. 지난 이야기를 해보자면 소위 전설이라 불리는 90년대 학번 때는 부정행위 하는 사람이 없었을까요? 아닐 겁니다. 제가 직접 보고 들은 것도 몇 번 됩니다. 하지만 지금과 달랐던 건 강심장이 아니면 한번은 해도 다시는 하지 못했을 뿐 입니다. 누군가 부정행위를 하면 그날 당시 인트라넷이던 i2에서는 난리가 났었습니다. 어디서 무슨 과목 시험 보던 어떤 친구가 부정행위를 했는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글과 댓글들이 올라오고 그러면 학부나 팀 친구들로부터 “무슨 일 있었냐?”, “요즘 고민 있냐?” 등의 질문 공세를 당하다 보면 다음번에는 또 그럴만한 엄두를 내지 못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도 팀에 어울리지 못하는 친구들이 당연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찬가지 이유로 친구들, 팀원들뿐만 아니라 교수님과 생활관 간사님들까지도 진심으로 걱정해 주시며 같이 기도하자고 혹은 상담하자고 하시는 등 공동체 안에서 다른 구성원에 대한 서로 간의 가끔은 불편할 정도로 지대한 관심들이 있었다고 기억합니다.

혹시 지금 공동체 안에서 학교생활 힘들어하고 있는 친구들이 있다면 그 친구들의 이름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보이려면 그 이름을 아는 것이 첫 번째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옛날보다 학생 수가 많지만 RC단위로 따진다면 숫자는 중요한 요소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 주변에 누군가가 공동체와 함께하지 못했을 때 그 개인의 잘잘못을 지적하기 앞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왜 그러는지 관심을 가져 보셨습니까? 혹시 그냥 외면해 버리지는 않으셨습니까? 진짜 예수님의 공동체라면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한동이 변했다는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한동이 가장 한동다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물어오면 저는 공동체의 회복에 있다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한동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기초 단위가 팀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바꾸기 원하십니까? 한동을 바꾸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본인의 팀은 바꾸셨습니까? 우리 스스로 먼저 물어 봅시다.

콘텐츠융합디자인학부 이중섭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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