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버스 타는 것을 좋아했다. 어쩔 수 없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었지만, 그 안에는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단함으로 자고 있는 사람, 재잘거리면서 친구와 이야기하는 사람들, 멍하니 차창 밖의 간판을 읽는 사람, 나이 든 사람과 젊은 사람 등등. 저마다의 모습으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구체적 삶의 이야기는 모르지만, 여러 모양의 삶을 관찰할 수 있다. 새벽이나 밤에 타는 버스에는 삶의 고단함과 피곤이 묻어 있고, 낮에 타는 버스는 삶의 분주함이 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필자 나름대로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었다.
 최근에 서울에 다녀올 일이 있어서 고속버스를 타려고 시내버스로 터미널까지 간 적이 있다. 요즘은 주로 자가용을 이용하기에 시내버스는 오랜만에(?) 탄 것이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보았다. 오래전에 스쳤던 생각과 해묵은 느낌이 다시 올라왔다. 살아가는 삶과 고단함이 배어 있는 인생에 대한 생각이다. 그런데, 불현듯이 또 다른 생각이 스쳤다. 요즘 혹시 삶의 또 다른 진실에 무감각하게 지낸 것을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 진실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마치 자가용을 타면 버스에서 느끼던 여러 인생과 삶의 모습을 볼 수 없듯이, 바쁘게 살아가는 삶에서 어느덧 함께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놓치고 살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늘 사람들을 대하고 만난다. 하지만, 익숙함이 주는 것이 있다. 또한 자기 중심성의 죄성이 주는 것도 있다. 주의하지 않으면 그 익숙함과 자기 중심성의 모습이 우리의 삶을 자신을 위한 업무로 만들 수 있다. 또한 주변의 사람들을 마치 조경으로 심어진 캠퍼스의 여러 나무들처럼 삶의 배경으로만 자리 잡게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의 눈이 말하는 것을 놓칠 수 있다. 그들의 어깨에 있는 삶의 무게나 마음의 짐들이 드러나는, 때로는 웃음을 담고 있기도 하고 때로 울음을 담고 있기도 한 사람의 눈. 그 눈이 말하는 소리를 놓칠 수 있다. 그 소리를 놓치면 여럿이 함께 사는 듯하지만, 사실은 울타리를 치고 혼자만의 세상에서 사는 것일 수 있다.
 하나님은 다르다. 인간을 창조하셨지만, 단순히 피조물의 하나 또는 주변 배경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처음부터 자신과 교제하고 관계를 나눌 수 있는 존재로 지으신 것이다. 비록 인간이 하나님을 거절하고 스스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주변 존재로 만들었지만, 그분은 여전히 인간을 주변 존재로 두기를 원치 않으셨다. 예수님이 증거이다.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과 십자가 사역을 통해 사람들을 향한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신 것이다. 그 예수님을 통해 끊어진 관계가 다시 연결되고, ‘나와 너’의 관계로 회복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분의 이 마음과 관심을 사람들과 함께 하는 필자의 삶의 영역에 다시금 끌어오고 싶다. 삶을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다시 확인하고, 사람들의 눈이 말하는 소리를 들으려 하고 그들을 필자의 삶의 중요한 존재들로 다시 자리매김 하고 싶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씀하신 것(롬 12:13)처럼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그분이 먼저 우리를 그분과 함께 하는 중요한 존재로 자리매김 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곁의 사람들은 우리가 함께 살라고 허락하신 중요하고도 감사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교목실 이재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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