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찍는 행위에 대한 경멸이 있다.
나를 포착하려 들지 않는 너를 나는 포착하려 든다.
그리고 많은 것을 설명한다.
폐수 위로 자라는 비참이라든가,
작은 것의 강인함이라든가,
순간이니 편린이니 하는.
‘오염’되지 않은 물을 욕망하고
좁은 일상의 시간 속에서
나의 작음은 물론 너와 나 사이
시간의 절박함도 잊었으면서,
유독 너에겐 이와 다른 삶의 태도를
요구하라는 유혹.
유혹의 냄새는 폐수도 꽃도 아닌 나로부터 풍긴다.
(향기에 마비된 코를 킁킁거리며
나는 어느 꿀을 좇는가)


꽃의 투쟁이 나의 투쟁이 될 리 없고
너의 최선이 나의 무죄를 입증하지 못한다.
아니, 입증한다.
이제 깨끗한 물을 마시고 다시
너를 통해 많은 것을 설명한다.
영속의 딜레마.
진실한 삶은 순간을 과시하지 않고,
진실한 말은 말해지기보다
들려지기를 그리워한다는데,
나는 너를 찍는 행위를 경멸하지 않는다.
많은 설명 속,
나는 조금도 설명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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