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주말 오후. 갑갑함을 못 이겨 집 근처 카페로 향했다. 탁 트인 창가에 앉아 어울리지 않는 커피 한 잔을 옆에 두고 책을 펼쳤다. 책을 두세 장 정도 읽으니 역시나 집중력은 떨어졌고 졸음이 오기 시작했다. ‘아, 집중력이 바닥이구나’하고 스스로를 한탄할 때, 옆 테이블에 앉아있는 40대 중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의 대화가 졸음을 쫓았다.
 남자와 여자는 교회에서 만난 사이인듯했다. 여자는 교회에 이제 막 다니기 시작한, 신의 존재에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남자는 교회를 꽤 오래 다닌 듯한, 신의 존재를 확신하는 사람이었다. 남녀는 신앙에 대한 고민을 나누기 시작했다. 여자가 말했다. “신을 믿는 건 아직 모르겠고, 일단 교회는 다녀보려고.” 남자가 답했다. “잘 생각했어. 근데, 너 꼭 믿어야 해.” 여자가 질문했다. “어떻게 신이 있다고 철석같이 믿지? 나는 잘 모르겠어.” 그러자 남자가 답했다. “너 신(하나님) 만나 봤어? 안 만나봤으면 말을 하지 마. 너 진짜 믿어야 해.” 그러자 여자는 피식하고 웃으며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의 웃음과 끄덕임을 자아낸 요인은 무엇일까. '프레임 설정'의 관점에서 대화 내용을 분석해보자. 남자는 '신은 존재한다'는 프레임을 미리 설정하고 그것 안에서 대화를 나누려 했다. 이에 남자는 여자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스스로가 설정한 프레임을 전제로 ‘믿으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남자의 프레임에 동의하지 못하는 여자가 ‘어떻게 신이 있다고 철석같이 믿느냐’고 물으며 남자의 프레임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자 남자는 질문에 대한 설명 대신 자신의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신의 존재를 모르면 말도 하지 말라’고 말하며 여자의 입을 차단해버렸다. 당연히, 남녀 간의 소통은 실패했다. 프레임 설정이 소통에서 중요한 시작점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례이다.
 시선을 옮겨보자. 지난 23일 오후 8시, 버스요금 소통마당이 열렸다. 그러나 패널과 학생 간의 소통은 처음부터 실패가 예견돼 있었다. 프레임에 대한 공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통마당에 참여한 패널들은 '버스 적자는 학생이 함께 부담해야 할 일'이라는 프레임을 설정한 상태에서 대화를 시작했다. 소통마당에서 던져지는 질문과는 상관없이 패널들은 위의 프레임을 전제로 ‘학교는 돈이 없고, 버스는 적자를 낸다. 적자를 막기 위해선 버스 요금을 인상할 수밖에 없다. 이해해달라’는 순환 논리를 펼쳤다. ‘왜 학생이 버스 적자를 함께 부담해야 하느냐’는 프레임 자체에 대한 질문에는 명확한 답이 없었다. 이에 해당 프레임에 공감하지 않는 학생은 답답했고, 무기력했다.
 합의되지 않은 프레임 위에서 이뤄지는 대화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소통의 실패가 예견된 시간 낭비일 뿐이다. 이에 진정한 소통을 원한다면, 소통의 첫 단추가 되는 프레임 설정을 양자가 함께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소통은 계속 실패할 것이며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카페에서 남자와 대화를 나눴던 여자는 교회를 다니고 있을까? 분명, 여자의 웃음과 끄덕임은 이미 갇힌 프레임 속에서 대화해야 하는 답답함의 표현일 것이다. 아, 어쩌면 그녀의 웃음과 끄덕임에 체념이 섞여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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