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이 시기가 되면 한동은 정직이라는 가치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 새내기들은 한스트에서 명예 서약식을 하고 가슴에 배지를 달며 학교 안 곳곳에서는 아너코드에 대한 당부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한동인성교육에서는 많은 시간을 투자해 정직을 가르치고 베네딕트나 어메이징스토리 등 여러 단체에서 정직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렇게 우리는 매년 정직과 성실이 세상을 바꾼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한동대가 대외적으로 표방해온 것만큼 아너코드가 우리의 삶을 바꾸었는가 질문한다면, 답변은 쉽지 않다. 매년 반복되는 도난 사건과 컨닝은 소수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사소한 문제다. 하지만 세상을 바꾼다는 정직이 실제 우리의 삶을, 그리고 한동을 바꾸고 있는가? 수강신청에서 수업을 잡아준다든가 도서관 자리를 사석화하는 문제는 더 이상 합리화를 하지도 않는 관례가 되었으며 여전히 한동의 많은 부분에서 적법절차들이 외면되고 있고 학생들은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말과 달리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무관심하다. 이러한 문제들은 이상과 현실의 대립으로 손쉽게 도식화할 수 없는 문제다. 개인의 정직에 대해 그렇게 강조하는데 우리의 문화는 왜 다르지 않는 걸까? 아니 그보다 근본적으로, 대체 정직은 무엇이며 우리는 왜 정직해야 하는가?
 정직이란 사전적 정의로 마음에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바르고 곧음을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 정직이란 단어를 해석하고 사용할 때, 온전히 정직을 이해하지 못하고 일관성 없이 사용한다는 점에 있다. 정직을 정의의 전반부인 거짓 없음으로만 해석하거나 후반부인 바르고 곧음으로만 해석한다면 이미 심각한 오류가 발생한다. 그런데 심지어 우리는 자신에게 적용시킬 때에는 거짓 없음으로 해석하고 타인에게 적용시킬 때에는 바르고 곧음으로 사용하는 행태를 종종 보인다.
 정직이 거짓 없음만으로 해석될 때, 그 범위는 가장 소극적이게 된다. 거짓말만 하지 않으면 대부분의 행위가 용인되기에 뒤틀려 있는 사회문제에 있어서도 개인은 눈을 감으면 되는 것이다. 이때 정직은 그저 개인적인 실천의 문제로 국한된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바르고 곧음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시킬 때 발생한다. 바르고 곧다는 기준을 내가 세우고 타인에게 정직해야 한다는 충고와 협박을 하는 사태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일은 정직이라는 가치를 강조할수록 빈번해진다. 권력자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강요할 수 있으며 학우들 간에는 정직몽둥이로 서로를 재단하는 폭력이 발생한다.
 한동이 정직을 주창하는 이유가 사회적인 문제는 등한시하며 내 이웃에게는 엄격한 대학생을 키우고 싶어함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이제는 정직을 강조하기보다 정직이 무엇인지, 왜 우리가 정직해야 하는지 돌아볼 때이다. 예수가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정직해야 한다고 말한 적은 없다. 그가 말하는 정직의 바르고 곧음은 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웃을 사랑한다면 개인의 문제는 흠을 가려주고 사회적 문제는 더 날카롭게 바라보아 모두가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바르고 곧은 것이 아닐까? 경제학입문을 가르치시는 한 교수님께서 수업 시간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한동이 무감독시험을 홍보하고 다니지만 시험에서 실제로 아무도 컨닝하지 않을 때 학생을 믿는 것은 어느 대학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한동의 무감독시험이 차별화되려면 모든 학생이 컨닝을 할지언정 학생을 믿어야 한다.” 교수님의 말씀처럼 믿음과 사랑이 바르고 곧음이 될 때, 그제야 정직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법학부 08학번 서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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