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모든 과정에는 반드시 첫 만남이 있다. 그 시작은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 처음 눈을 뜨고 사람들을 처음 본 순간일 것이다. 그 뿐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늘 첫 만남이라는 것을 경험하면서 살아간다. 심지어 마지막 순간에서도 우리는 첫 만남을 경험한다. 우리의 삶을 마치는 것 역시 처음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늘 첫 만남의 연속인 듯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연습 없이 처음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 역시 이런 첫 만남의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처럼 성경의 모든 인물들이 첫 만남을 가득 담은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첫 만남은 어떠했을까? 아담이 처음 눈을 떠서 세상과 첫 만남을 가졌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생애 처음으로 타자(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만남을 시작할 때 어땠을까? 모르겠다. 상상이 잘 안 된다. 하지만, 부정적 느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때는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만드는 죄가 없었으니까. 그 반응은 처음으로 자기와 동일한 사람을 만났을 때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던 창세기 2:23에서 추론할 수 있을 것 같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지아비에게서 나왔으니 지어미라고 부르리라!" (공동번역).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으면 이렇게 외쳤을까? 아담에게 첫 만남은 감격 그 자체였을지 모른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고 모든 것이 다 신기하니까.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첫 만남은 관계의 시작이지만, 그것이 이후 관계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아담의 감격스러운 탄성은 창세기 3:12에서 자기의 아내에게 죄를 전가하는 추한 변명으로 바뀐다. 아담이 핑계를 댄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개역개정). 처음으로 자신 외에 타자의 음성을 듣게 한 그 하나님을 근본적 원인으로 말하고, 처음으로 자신과 동일한 존재로 만났던 아내를 자신의 죄에 대한 또 다른 원인으로 말한다. 자신의 정당성을 위해 첫 만남의 감사를 뒤집고 모든 관계를 무너뜨리는 장면이다. 슬픈 사건이지만, 우리 역시 무수히 보고 듣고 경험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첫 만남의 감사가 이후의 관계에서 좋은 모습으로 연결되지 않는 것이다.
 3월이다. 캠퍼스에 신입생들이 들어오고 소위 말하는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관계들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재학생들과 교수님들을 포함한 기존 한동인들도 마찬가지이다. 2016년 봄은 모두에게 처음 맞는 시간이기 때문에 지난 관계와 다른 모습을 만들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새로운 시간에 만남을 통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감사이다.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는 좋은 관계를 맺어갈 수 있는 시작이며, 이미 만남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시간을 배경으로 귀한 관계로 만들어 가거나 깊어지는 또 다른 시작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세기 1-2장과 3장의 변화를 타산지석의 교훈으로 기억했으면 좋겠다. 귀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첫 만남의 감사를 귀한 것으로 여기고 이후 맺게 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감사가 더욱 넘치는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 가기를 소망해 본다. 점점 많은 꽃들이 피고 녹음이 우거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첫 만남의 감사가 귀한 관계로 깊어지는 우리의 삶을 기대해 본다.

이재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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