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를 졸업하고 단편 영화 <격정 소나타>를 연출했던 故최고은 씨는 자신의 자취방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죽기 전 “그동안 도움 많이 감사했습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라는 쪽지를 남겨 국민의 가슴을 저리게 만들었다. 이뿐만 아니다. 작년 6월에는 배우 故김운하 씨와 故판영진 씨가 생을 마감했다. 판 씨는 지인에게 자살을 암시하는 메시지를 남기고 차 안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어째서 예술인들은 생활고로 죽어가는 것일까?

▲ 가난에 시달리는 예술가. 김남균 사진기자


이렇게 생활고를 겪는 것은 일부 예술가만의 사정이 아니다. 2015년에 시행된 한국예술종합학교 청년예술가 일자리지원센터의 청년예술가 503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 따르면 설문대상의 24%가 ‘수입이 없다’고, 16%가 50만 원을 갓 넘긴다고 답했다. 故최고은 씨의 죽음 이후, 예술가 복지법이 제정된 지 4년이 되어가지만, 대다수의 청년예술가는 여전히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EBS 기획취재 청년예술가> 편에 출연했던 2명의 청년예술가 어효은 씨, 박선영 씨, 그리고 한동대 이찬규(언론정보 05) 씨의 이야기를 통해 청년예술가의 삶을 들여다보자.

청춘과 맞바꾼 예술, 남은 건?
새벽 5시, 무명의 연극배우인 어효은 씨는 졸린 눈을 부릅뜨고 연습실로 향한다. 무대에 오를 날이 며칠 남지 않는 어 씨는 희곡 연습에 열을 올린다. 하루 7~8시간의 연습을 몇 달간 거쳐야 한 편의 연극에 오를 수 있다. 어 씨가 받는 돈은 한 달에 50만 원 정도. 연극이 없을 때는 이마저도 받지 못한다. 당연히 어 씨가 연극으로 버는 금액만으로는 생활을 지속하기 힘들다. “청년 예술인들 같은 경우는 작품의 편수나 활동 기간, 성과에 있어서 내놓을만한 게 적은 편이잖아요. 그러니까 청년 예술인들은 더 소외될 수밖에 없죠.” 꽃다운 청춘을 보낼 시기에 어 씨는 남들과는 다른 일상을 산다.
 해가 진 후 어 씨는 또 다른 곳으로 향한다. 새벽 1시까지 이어지는 음식점 아르바이트. 시급은 6천 원 남짓으로 방값을 내고 나면 수중에 남은 돈은 얼마 없다. 어 씨는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하는 편이라서, 좋아하는 것을 한다는 생각에, 아직까지 힘들거나 그런 것 없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국악 작곡가 박선영 씨는 밀린 작곡비를 2년째 받지 못하고 있다. 애초 약속한 돈은 300만 원이었지만 지금까지 받은 돈은 백만 원에 불과하다. 여건이 어려운 것도 아닌데 계약비 지급을 계속해서 미루는 것이다. 박 씨는 “화가 나고 힘들죠. 하지만 사정이 이렇다고 계약서를 요구했다가는 아예 일자리를 놓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라고 토로했다.
 어 씨, 박 씨와 같이 힘없는 예술가들에게는 말뿐인 구두계약이 대부분이고 4대 보험은 꿈도 꾸기 힘들다. 2011년 청년예술가 최고은 씨의 죽음을 계기로 창설된 예술가 복지법의 적용을 받기도 힘들다. 예술가로 인정받으려면 자신의 예술 활동을 증명해야 하는데 이제 막 예술가로 데뷔한 이들에게는 자신이 예술가임을 증명할 활동은 턱없이 부족하다. 박 씨는 “예술도 노동으로, 예술가를 더 존중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예술인도 모르는 시행 4년 차 예술인 복지법
연극무대 조성 및 스태프 기획 일을 하는 이찬규(언론정보 05) 씨는 설날도 반납하고 무대를 만든다. 이 씨는 매년 3~4편의 연극에 참가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계약서 작성 없이 일한다. 심지어 절반 가까이의 회사 공연이 아닌 극단 단기공연이거나 지인들이 모여 만드는 연극의 경우는 급료를 기대하지 않고 참여했다. 연극 기획 및 기술지원 스태프 일만으로는 넉넉지 못한 이 씨는 다른 일을 병행하며 한숨을 돌린다.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서 확실히 넉넉하다고는 못하죠. 이전에는 공연관광협회, 드라마 및 홈쇼핑 방송국 등의 일을 했었고, 현재는 아현시장 문화관광형 시장사업단(이하 사업단) 일을 하고 있습니다.” 향후의 계획에 대해 이 씨는 “현재 일하고 있는 사업단에서 이달까지만 일할 계획이다”라며 이후의 생활에 지장이 없느냐는 질문에 “당연히 어려움이 있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또 다른 일들을 찾아 해야겠죠”라 답했다.
 이 씨의 경우는 최근 3년 이내에 기획, 기술지원 스태프로 3편 이상의 연극 공연에 참여해 예술인 복지법에 따라 예술인으로 인정받고 다양한 지원사업에 신청할 수 있다. 하지만 시행한 지 4년이 다 되어 가는 예술인 복지법에 대해 들어보았냐는 질문에 “들어봤는데 상세한 내용은 모른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들은 정도다”라고 답했다.

▲ 그래픽 박희선


보편적 복지 아닌 선별적 복지
예술인 복지법은 생활고에 시달리는 예술인들을 위하여 2007년 처음 제안됐다. 그 이후 제정이 정체돼 있던 예술인 복지법은 2011년 1월 故최고은 씨의 죽음을 계기로 2012년 처음 제정됐다. 또한, 예술인 복지를 위해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설립됐다. 하지만 많은 예술인은 예술인 복지법에 해당하지 않는다. 복지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예술인 복지법 2조에 의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창작, 실연, 기술지원 등의 활동을 증명할 수 있는 자’여야 하기 때문이다. 즉, 저작권법 제2조 제1호 및 제25호에 따른 공표된 저작물이 있거나(일러스트 참고) 예술 활동으로 얻은 소득이 있는 자, 혹은 그 밖에 위 두 사항에 준하는 예술 활동 실적이 있는 자만 예술가로 취급하겠다는 것이다.
 예술인의 삶이 정당하게 존중될 수 있는 노동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설립된, 예술인 노동조합인 예술인소셜유니온의 나도원 위원장(이하 나 위원장)은 “청년예술가뿐만 아니라 꽤 활동을 오래 한 예술인도 복지재단이 요구하는 자격요건에 안 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더욱이 예술인 복지법의 예술인 조건을 만족하고,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 자신의 예술활동을 증명받아도 복지 혜택을 받는 사람은 일부분이다. 나 위원장은 “예술인 복지법의 취지는 대부분 예술인이 보편적으로 복지를 보장받을 수 있게 한다는 것인데 현재는 일부 예술인만 빼서 선별 지원해주는 방식이다”라고 말했다. 근로계약서 체결에 관해서도 법률상에서 의무화가 되어있지 않고 일종의 권고 정도에서 끝난다.

세계적 화제, 예술가 복지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예술인 복지는 중요한 이슈였다. 해외의 경우에는 예술인 복지를 위해 다양한 제도가 마련돼 있다. 독일은 1983년부터 예술인과 자유기고가들을 대상으로 연금보험 비용을 예술인 50%, 연방정부 20%, 그리고 문화산업 기업이 30%를 부담하는 ‘예술가 사회보험법’을 시행했다. 또한, 프랑스의 ‘앵테르미탕’은 비정규직 예술인을 위한 실험보험 제도이고, 이탈리아에는 예술인에게 실업급여, 사회보험을 제공하는 특별사회보장제도가 있다. 캐나다와 네덜란드에는 각각 예술가 지위법과 최저생활보장제도가 있다. 룩셈부르크도 문화사회기금을 통해 예술 활동을 하면서 최저소득에 미달하는 이들에게 생계를 지원한다. 나 위원장은 “예술인 복지 증진을 위해서는 한국 예술인들 사이에 조직화가 필요하다”며 “그들(예술인)이 갖고 있는 목소리를 모아낼 때만 예술인 복지에 대해 진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몇 년간, 故최고은, 故김운하, 故판영진 씨 등 예술인의 자살 소식은 계속해서 우리의 귀에 들려왔다. 아직 개정 중인 예술인 복지법의 실효성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가난’과 ‘예술’은 멀어질 수 없는 단어인 것일까?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염신규 이사는 「가난한 ‘예술’에 지원이 필요한 이유」에서 “예술은 근본적으로 가난해야 한다. 하지만 이 가난이 걸인의 초라한 궁핍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이 시대 예술가에게 필요한 가난이란 염결한 영혼의 진정성과 반성적 상상력을 지켜나가기 위한 방패여야 한다”라고 말했다. 몇 년째 제자리인 예술인들의 생활고. 죽음이 더는 반복되지 않도록 더 나은 복지정책이 수립되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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