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수저 빙고게임을 아는가? 가로 네 칸, 세로 네 칸짜리 빙고에는 ‘연립주택에 산다’, ‘집에 비데가 없다’, ‘집에 곰팡이 핀 곳 있다’ 등 흙수저의 조건이 나열돼 있다. 해당사항에 하나하나씩 동그라미를 치다 보면, 빙고! 벌써 한 줄이 완성됐다. 빙고가 완성된 흙수저들은 이내 고개를 떨군다. 비단 이 빙고게임 뿐만 아닌 삶의 곳곳에서도 흙수저들은 고달프다. 수십 개 쓴 이력서는 서류통과가 하늘의 별 따기다. 다 포기하고 싶지만 집안 사정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다. 나이를 먹을수록 챙겨야 하는 경조사는 늘어간다. 그렇다고 돈 몇 푼 아끼자고 인간관계를 다 끊기도 힘들다. 결국, 가볍게 입고 덜 먹으며 허리띠를 졸라맨다. 현실의 벽에 부딪힌 현대 청년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최근 디시인사이드 갤러리에는 흙수저 갤러리가 생성됐다. 개설된 지 이틀 만에 게시물 3,000개를 돌파하는 등 인터넷상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주로 올라오는 글은 ‘흙수저 인증’ 사진이다. 텅텅 빈 통장 잔액이나 본인의 거주지 등을 찍어 올린다. 3포, N포를 넘어서 이제는 ‘인간 등급표’를 매긴다. 이른바 수저 계급론은 부모의 재산 정도에 따라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 등으로 나눈다. 취업은 기적, 취업은 신의 선물이라는 자조적인 말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등장한 수저 계급론은 예전엔 볼 수 없었던 젊은 세대들의 사회에 대한 반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준다.

우리 모두는 수저를 입에 물고 산다
수저로 출신 환경을 빗대는 표현의 유래는 영어 속담인 ‘Born with a silver spoon in mouth(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다)’으로부터 비롯된다. 옛 유럽 귀족들이 어머니 대신 유모가 갓난아기에게 은수저로 젖을 먹이던 풍습에서 유래 된 것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SNS에서 떠도는 수저 기준표에 따르면 ▲ 금수저 는 자산 20억 원 또는 가구 연 수입 2억 원 ▲ 은수저 는 자산 10억 원 또는 가구 연 수입 8000만 원▲동수저는 자산 5억 원 또는 가구 연 수입 5500만 원 ▲흙수저는 자산 5000만 원 미만 또는 가구 연 수입 2000만 원 미만으로 구분된다.
부의 대물림으로 인한 계급 차와 함께 경제불황으로 인한 취업 실패, 성공에 대한 포기가 겹쳐 자기를 비하하고 배경을 탓하는 자학이 수저 계급론을 만들어냈다. ▲모든 문제를 나라 탓으로 돌려 대한민국을 비하하는 ‘헬조선’ ▲아무리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 현실에 남의 노력을 비하하는 ‘노오력’ ▲부모에게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해 삶의 낙오자로 운명 지어진 자신을 비하하는 ‘흙수저’등의 단어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흙수저와 같은 자학코드가 나타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동국대 경제학과 김낙년 교수의 <한국의 부의 불평등 2000~2013>에 따르면 상위 계층(10%)이 자산의 66%를 점유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부의 불평등 수준은 상위 10%의 자산보유 현황이 미국 76.3%, 영국 70.5%에 이어 한국 66% 순으로 3위에 해당했다. 지난 6월의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국내 청년실업률 또한 10.2%로 외환위기 이후 최고치를 찍었다. 김 교수는 “경제활동보다 대물림하는 부가 재산형성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라며 “청년세대의 자조적 표현인 수저 계급론도 현실에 대한 포기, 분노와 맥락을 같이 한다”라고 말했다.

내 탓이오, 아니 네 탓이오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배경을 극복하기 힘든 상황은 오래 전부터 확인 할 수 있던 사회현상이다. 1997년 외환위기로 청년실업 문제가 치솟았고, 그 후 꾸준히 증가한 저임금노동으로 착취당한 88만원 세대가 그러했다.
‘테레비에서 보니까 그 프랑스 백수 애들은 일자리 달라고 다 때려 부수고 개지랄을 떨던데. 우리나라 백수들은 다 지 탓인 줄 알아요. 응? 지가 못나서 그런 줄 알고.’ 2010년 개봉한 김광식 감독의 영화 <내 깡패 같은 애인>에서 삼류 깡패 동철(박중훈)이 한 대사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취업과 성공에 대한 주된 생각은 ‘자기 능력과 의지 부족으로 인한 결과’였다. 2000년대 초반부터 베스트셀러 순위를 꽉 채운 자기노력과 개인의 능력개발을 중요시한 자기 계발서와 1990년대 천주교 평신도협의회 최홍균 회장이 주도했던 ‘내탓이오’ 운동은 당시 사회의 자기 책임론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현재의 대한민국은 국가와 환경, 부모를 탓하는 양산을 띤다. 또한, 올해 리서치기관 엠브레인이 2~30대 청년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대한민국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라는 설문에서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없어서’가 1위를 차지하고 그 뒤로 ‘공평하지가 않아서’, ‘빈부 격차가 심해서’, ‘경쟁이 심해서’가 뒤를 이었다. 재물과 재화가 공평하게 분배되고 있지 않다는 불신이 사회 전반에 팽배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이 노력해도 지금보다 나아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학습된 무력감’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이는 삶을 포기하는 N포 세대와 부모와 배경 탓을 하는 이른바 ‘흙수저’들의 등장배경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온라인 취업포털 사람인(이하 사람인)이 구직자 1,082명을 상대로 ‘본인이 생각하는 계층은 금수저인가, 흙수저인가’를 조사한 결과, 응답자 59%가 흙수저라고 답했다. 실제로 자신이 흙수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 만큼 사회를 불편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많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흙수저 갤러리를 이용하는 이요한(26) 씨는 “더 이상 개인의 희망만으로 절망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라며 “유행어로 자리잡은 ‘노오력’이란 단어에서 기성세대들이 청년들에게 격려하는 것을 얼마나 아니꼽게 여기는지 보여주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중앙대 사회학과 이병훈 교수는 “88만 원 세대가 진화해 자기비하로 가득 찬 흙수저가 됐다”라며 “현실이 싫고 좌절만 한다고 바뀌는 것은 아니다. 사회를 무작정 부정하는 것보다 문제를 고쳐나가는 힘으로 돌려야 한다”라고 말했다.

견디고 견뎌 도자기가 된다
수저 계급론이 규정하는 은수저인 건국대학교 건축과 박유미(22) 씨, 흙수저 여준호(27) 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수저 계급론에 대해 박 씨는 “사실 살면서 내가 은수저다, 금수저라고 생각하진 않았다”라며 “SNS에서 계급표를 보니 은수저나 금수저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라고 말했다. 여 씨는 “집안 사정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흙수저라는 단어로 딱 규정이 되고 나니 처음엔 조금 불쾌했다”라며 “하지만 생각해보면 흙수저가 맞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박 씨의 아버지는 사업을 한다. 사업이 꽤 잘돼 연 가구 수입이 1억원 정도 된다. 연 수입 8000만원 이상이면 해당하는 은수저다. 은수저라고 하지만 그 또한 미래가 두렵다. 특히나 박 씨는 건축과여서 졸업 후의 취업 걱정이 크다. 그는 자신이 은수저인 것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대학생들과 크게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등록금 분납, 장학금 경쟁 등 동기들은 대학 등록금 때문에 골머리지만 박 씨는 등록금 걱정을 해본 적이 없다. 부모님으로부터 용돈도 꼬박꼬박 받으니 생활에도 여유가 있다. 학부를 졸업하고 계획하고 있는 독일 유학은 금전적 부담감이 없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적어도 그는 유학에 드는 비용을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현재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이른바 취준생인 여 씨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취업을 준비하면서도 알바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고 있다. 취업에만 집중하고 싶지만 당장의 생활비가 없기 때문이다. 가끔 TV나 미디어 매체에 나오는 금수저들을 보면 조용히 한숨을 쉬곤 한다. 같은 시기에 졸업한 대학 친구는 아버지의 회사를 물려받았다. 가끔은 그에게도 회사를 물려줄 부모님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자신이 가진 배경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 같느냐는 질문에 여 씨는 아무리 노력해도 금수저들의 삶을 따라잡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은 한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요즘 유행하는 흙수저나 헬조선 등 자신을 비하하며 남 탓하는 것에도 거부감이 든다고 밝혔다. 여 씨는 최근 수저 계급론이 유행하자 나온 흙수저 만화를 이야기하며 불에 가장 강한 것은 흙이라고 생각한다며 “버티고 버티다 보면 금과 은은 될 수 없어도 도자기는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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