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다세대 주택들이 밀집된 서울시 마포구 염리동은 몇 년 전만 해도 절도를 비롯한 각종 범죄에 노출돼 있었다. 어두운 골목길에선 느닷없이 ‘바바리맨’이 나타났고, 젊은 여성을 노리는 성범죄 등 사건사고가 발생했던 염리동은 지난 2012년, 서울시의 ‘범죄예방디자인사업’으로 옷을 갈아입으며 환골탈태했다. 이제는 전국 여러 지방 사람들이 염리동의 우수한 범죄예방디자인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탐방을 할 정도다. 우중충한 골목에서 화사한 소금길로 재탄생한 ‘염리동 소금길’을 찾아가 봤다.

오래된 집들 사이사이로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좁은 골목길, 인적이 드물어 각종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안전 취약 지역. 예로부터 소금 창고가 많아 소금 장수가 살던 동네였던 ‘염리’다. 염리동은 범죄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는 지수를 측정해 만들어진 ‘범죄공포지도’의 주요장소 중 하나였다. 이 ‘염리’가 완전히 새로운 공간으로 바뀌었다. 운동을 할 만한 놀이터나 공원은 없고 인적까지 드물어 무섭기만 했던 ‘염리’의 좁은 골목길이 1.7km의 서울시 대표 산책길인 ‘소금길’로 탈바꿈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환경을 변화시키는 디자인의 힘이었다.

사라진 소금 빛, 어둠 속 염리
염리동의 염자는 소금 염(鹽)자다. 조선시대 수상교통의 요지로 대표적인 나루터였던 마포나루는 서해안에서 생산된 소금 대부분이 유통되는 곳이었다. 이 소금 창고들을 중심으로 소금장수들이 모여 살던 곳이 바로 염리동이다. 소금장수들이 몰려 생긴 마을이다 보니, 소금장수들의 발길 닿는 대로 길이 만들어졌다. 그 탓에 염리동은 길이 구불구불한 형태로 뒤엉켜있다. 또한, 비탈진 지형 때문에 큰 건물을 짓지 못해 움막집들을 지어 마을을 이루게 됐다.
사람들로 북적거렸던 염리동도 소금산업이 사라지면서 사람들이 차츰 빠져나갔다. 마을 전체를 환하게 비췄던 소금 빛은 이미 오래전 이야기였다. 설상가상으로 재개발 계획마저 미뤄지면서 골목은 더욱 쇠퇴하게 됐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노인과 여성 거주자들만 남게 됐고, 서울의 대표적 달동네가 됐다. 좁고 어두운 골목에는 CCTV도 없고, 밤이면 상점도 문을 닫아 범죄의 표적이 되어도 도움을 청할 수 없었다. 낡은 주택들 사이로 나 있는 작은 골목은 범죄가 기승을 부리며 점점 더 을씨년스러워졌다. 염리동 주민인 박용화(65) 씨는 “염리동은 밤이 되면 엄청나게 깜깜해진다”라며 “딸이 저녁 늦게 퇴근하다 보니 항상 불안했다”라고 말했다.

 

▲ 소금길 지킴이 집 제2호의 모습이다. 염리동의 가정집은 밤이 되면 지킴이 집으로 변한다.

 

▲ 전봇대에 갖춰져 있는 신호 버튼이다. 버튼을 누르면 관할경찰서로 연락이 간다.

긍정적 나비효과, 디자인의 힘
2012년 4월, 서울시가 한국형사정책연구원과 함께 ‘범죄예방디자인’ 사업을 추진했다. 당시 경찰청이 지정한 161개 ‘서민보호 치안 강화구역’ 중에서도 대책 마련이 시급한 서울 마포구 염리동 골목길을 선정, 환경개선에 나섰고 2014년 1월 ‘염리동 소금길’이 탄생했다. 염리동은 범죄 발생 기회를 사전에 차단하고 예방하는 범죄예방디자인으로 주민들이 범죄 불안감을 느끼는 곳을 연결해 1.7km의 ‘소금길’ 산책로를 만들고 곳곳에 안전장치를 뒀다.
실제로 노란색 선으로 연결된 소금길을 걸으면 소금길로 지정된 골목이 다른 골목보다 더 좁고 어두운 골목임을 알 수 있다. 소금길마다 가로등을 촘촘히 설치하고 전봇대에는 비상벨을 달았다. 밤늦게도 보일 수 있게 밝은 노란색으로 칠했다. 노란 가이드라인은 혹여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도 길을 잃지 않게 하고 전봇대의 숫자들로 자신이 있는 장소를 한 번에 알릴 수 있게 했다. 이외에도 마을에서 지원한 주민들을 상대로 여섯 가구를 선발해 CCTV와 경보 스위치를 단 노란 대문의 집들은 밤이 되면 ‘소금길 지킴이네 집’으로 변한다.
이제는 밝은 분위기가 물씬 풍기지만 혹여 소금길에서 위험에 처했다면 지킴이와 지킴이집의 비상벨을 2초 이상 눌러 이웃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경찰에 신고해야 할 경우에는 전신주의 번호로 자신의 위치를 알리면 더욱 쉽게 신고를 할 수가 있으니 근처 전신주의 번호를 알아두면 더욱 좋다. 게다가 소금길 나루는 위험한 상황 시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염리동 주민, 염리동을 찾은 사람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곽대경 교수는 “범죄예방디자인사업으로 주변 환경이 개선된 마을은 주민들의 관심도가 높아지기 마련이다”라며 “범죄자들이 이런 마을을 범행 장소로 택하는 건 어렵다. 심리적으로 위축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주민들이 범죄를 단속하는 ‘공공의 눈’이 되는 동시에 소금길은 범죄 사각지대에서 벗어나게 되는 효과를 얻었다. 작은 변화에서 시작된 긍정적 나비효과였다.

 

▲ 여행 책을 파는 ‘일단멈춤’의 모습이다.

 

소금길에서 일단 멈춤
이러한 변화 후, 주민들의 소금길에 대한 만족도는 높았다. 실제로 서울시가 2013년 3월에 염리동 주민 2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범죄 두려움이 13.6% 감소했다. 또한, 범죄예방효과 78.6%, 주민 만족도 83.3%가 증가했다. 마을 주민 김정화(42) 씨는 “그림과 색이 칠해지니 깨끗해졌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모이자 조금씩 새로운 가게들이 문을 열었다.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동시에 건물에 벽화와 노란 전봇대로 아기자기한 느낌을 주는 소금길은 서울의 이색 골목길이자 데이트 장소로 손꼽히게 됐다.
골목 곳곳에는 어린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놀이판들이 그려져 있다. 또한, 담벼락의 벽화와 소금길 곳곳에 구비돼 있는 운동기구들은 사람의 발길이 끊겼던 염리동을 변화시켰다. 이러한 변화는 마을에 대한 주민들의 만족감을 높이는 동시에 공동체성을 키웠다. 또 환경 개선에 대한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는 무섭고 불안했던 좁은 골목을 걷고 싶은 산책로로 만들었다.
소금길 산책길 초반에는 한서초등학교가 있다. 그 앞에서는 10살 남짓의 초등생 두 명이 학교 앞 문구점에서 300원에서 500원 하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간다. 풋풋한 첫사랑을 닮은 연인인 듯 수줍게 손을 잡고 걷는 것이 인상 깊다.
소금길을 걸으며 운동도 하고 사색에도 잠겨 걷다 보면 ‘일단멈춤’이라는 상호를 단 가게를 발견하게 된다. 가게엔 여행자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여행서적들이 빼곡히 메우고 있다. 소금길을 걷다 일단 멈춰 서 여행 책 한 권, 여행지의 분위기까지 고스란히 담은 엽서 한 장 구매해보는 것도 소금길을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이 될 것이다. ‘일단멈춤’에서 조금 더 밑으로 내려가면 디저트 전문카페인 ‘밀랑스’가 있다. 짭짤한 소금길과 다르게 달콤한 마카롱이 잔뜩 쌓여있는 카페 ‘밀랑스’는 소금길의 상징적인 색인 노란색으로 덮여있다. 다시 조금 올라와 소금길을 걸으면 ‘퇴근길 책 한잔’을 만나게 된다. 레오 카락스 감독의 <나쁜 피>를 상영하고, 인디 밴드 ‘플레이모드’의 소규모 공연을 연다. 사람들이 모여 독서 모임을 하기도 한다. 한편에서는 커피와 술을 팔기도 하고 쇼윈도에서는 기성 서점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책을 진열한다. 낡은 집들과 대비되게 노랗게 꾸며진 독특하고 양면적인 모습이 염리동을 닮았다.
이 외에도 ▲카페 솔티 ▲아현동 쓰리룸 ▲작업실 소확행 ▲언뜻가게 ▲빵 굽은 소마 ▲퍼넬스페셜티커피하우스 등 소금길을 찾은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가게들을 찾을 수 있다.

소금길에는 젊은 청춘들이 몰려온다. 젊은이들이 떠나고 노인들과 빈집이 가득했던 염리동에서 핸드 드립 커피를 내려 이웃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마신다. 마을 사람들을 불러다 놓고 노래를 부르고, 잔치하기도 한다. 염리동은 끊임없이 말과 생각을 나누는 소리로 시끄럽다. 이 모든 변화의 시작은 사소한 디자인의 변화였다. 소금장수들로 가득했던 예전 ‘염리’를 추억하며 이제 다시금 소금길의 앞날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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