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날 때부터 맹인으로 살아가는 한 사람에 대하여 제자들이 여쭈었다.
"그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그럼 왜 이 사람은 그렇게 고통스러운 장애인입니까?"
나는 초싹대며 질문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다."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그리고는 계속 말씀하신다.
"때가 아직 낮이니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요9:1-4)"
이 말씀에 충격을 받는다.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내 곁에 고통 받는 이웃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내가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게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장애인이고, 가난하고, 무지하고, 병들고, 방탕한 사람이 되어 내 곁에서 존재하는 이유는 그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명으로 부르시기 위해서 거기 그렇게 존재하게 하신 것이다.
한 때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는다면 목사나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한참 지난 후에야 교사나 의사나 정치가나 기업가나 농부들도 하나님의 부르시는 삶이요 길인 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통하여 이제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장애인으로 부르시고 어떤 사람은 가난한 자로 부르시며 어떤 사람은 고통당하는 사람으로 부르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아무 죄도 없이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위하여”,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게 하기 위하여, 그토록 고통스러운 희생자가 되게 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도 십자가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이것은 내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다.
"지극히 적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25:5)"
그들은 우리의 곁에서 예수님과 같은 존재로 존재한다. 그들은 그렇게 존재하기만 해도 위대한 가치를 갖는다. 그래서 고통 받는 이웃, 그들은 그를 도와야 할 나보다 더 훨씬 중요한 존재다. 그들이 중심이고 나는 그들의 보조자일 뿐이다. 그래서 성경은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더 요긴하다(고전12:22)고 말한다.
한동안 지능이 초등학교 3 학년 수준의 25세 청년과 함께 지낸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확실히 깨달은 것이 있다. 그는 내 영성의 뿌리였다. 그가 내 신앙고백의 대상이었다. 주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나의 신앙의 고백을 받으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나도 허망하게 죽어간 세월호의 아이들, 광활한 바다를 떠도는 시리아의 난민 어린이들, 굶주리는 북한의 어린이들... 그 누구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면 너무나 억울하다.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우리가 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은 숭고한 존재로 우리의 목전에 존재하고 있다.
그들의 존재를 헛되게 만드는 것도, 진정으로 존귀하게 만드는 것도 우리의 신앙고백적 선택으로 말미암아 결정될 것이다.

유장춘(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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