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기 이범석 장군의 명상길을 따라 올라가면 보이는 덕천마을의 정경이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얼마간 달렸다 싶으면 말고삐를 잡고 한동안 자신이 온 길을 돌아본다. 너무 빨리 달리면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매우 급하게 살아온 현대인들에게 아날로그적 삶이란 이제 그리운 단어가 됐다. 사람들은 그 속에서 쉼을 찾고 싶어한다. 슬로푸드, 슬로라이프, 슬로피플 등 느린 것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이 이제는 느린 도시, 슬로시티를 이야기한다.


슬로시티는 이탈리아의 치타슬로(cittaslow)에서 시작됐다. 1999년 10월 이탈리아 그레베 인 키안티(Greve in Chianti)의 파올로 사투르니니(Paolo Saturnini) 전 시장과 몇몇 시장들이 모여 ‘치타슬로’, 즉 슬로시티 운동을 출범시켰다. 이 운동은 21세기 기계적 삶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아름다운 정체성을 찾고 새로운 삶을 만들자는 취지를 갖고 있다. 그 결과 현재 전 세계 29개국 189개의 도시가 국제슬로시티로 지정돼 있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 슬로시티


국제슬로시티의 가입기준은 크게 7개의 평가로 나뉜다. ▲에너지 및 환경정책 ▲인프라 정책 ▲도시 삶의 질 정책 ▲농업, 관광 및 전통예술 보호 정책 ▲방문객 환대 ▲지역주민 마인드와 교육 ▲사회적 연대 파트너십의 평가요건에 따라 가입이 결정된다. 가입 후에도 슬로시티의 삶과 밀접한 도시 운영이 요구된다. 한국도 지난 2005년 11월 17일 한국 슬로시티추진위원회가 설립됐으며, 청산도가 처음으로 슬로시티로 지정됐다. 그리고 현재까지 영월, 상주, 예산, 전주 등이 슬로시티로 지정됐다. 한국은 다른 아시아 국가인 ▲터키 9개 도시 ▲중국 2개 도시 ▲일본 2개 도시 ▲대만 1개 도시에 비해 11개 도시가 지정돼 아시아 슬로시티 운동의 중심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 슬로시티본부는 ▲신규 치타슬로 후보 도시의 추천 ▲기존 슬로시티 도시의 재인증을 위한 품질 평가결과 취합 ▲국제슬로시티연맹과의 협의 및 중재 등의 역할을 맡고 있다. 한국슬로시티본부 손대현 이사장은 “인간 사회의 진정한 발전과 오래갈 미래를 위해서는 자연과 전통을 보호해야 한다”라며 “슬로시티의 철학은 자연, 전통 공동체를 지켜나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도시 , 청송

 

▲ 소헌공원에 있는 운봉관의 모습이다. 서예들이 전시돼 있다.


푸른 소나무 숲이란 ‘청송’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자연을 노래하다’라는 슬로건을 사용하는 청송군은 2011년 6월 25일 국제슬로시티로 지정됐다. 또한, *낙동정맥의 말단 정상에 위치한 산촌 형 슬로시티로, 완전한 생태 마을과 에코 슬로라이프 도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 10월 3일, 다른 수많은 슬로시티를 뒤로한 채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청송군을 찾았다. 청송군을 향하는 차는 산을 굽이굽이 돌아갔다. 긴 시간 푸른 자연과 조금씩 울긋불긋해진 산을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청송에 도착한다. 청송 공용버스터미널에서 내려 조금만 걸으면 청송 시내가 나온다. 슬로시티란 말이 무색하지 않게 시내임에도 조용하고 한적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시내 한 가운데 소헌공원이 있다. 조선 제4대 왕인 세종의 비, 소헌왕후의 이름을 따서 지은 소헌공원은 청송 주민들의 다양한 문화행사의 장과 휴식 터로 이용되고 있다. 방문 당시에도 ‘제2회 서화 예술전시회’가 진행돼 소헌공원 내의 운봉관에 줄을 지어 나열돼 있던 서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소헌공헌과 청송군 보건 의료원으로 향하는 사이로 섶다리를 볼 수 있다. 이 다리는 용전천의 강물이 늘어나면 강을 건너지 못할 청송심씨의 시조모를 위해 소나무 가지를 엮어 만들었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섶다리를 통해 용전천을 건너면 슬로시티의 자연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외씨버선 길이 보인다. 외씨버선 길은 청송에서부터 영월까지 슬로시티들을 잇는 슬로시티 길로 매년 4월 외씨버선 길 걷기 축제가 열린다. 이날 소헌공헌을 찾은 이종수(52) 씨는 “휴일을 맞아서 가까운 청송을 찾았는데 너무 조용하고 좋다”라며 “가족들과 함께 와서 편히 쉬고 갈 수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덕천마을, 고택을 걷다


청송 시내에서 조금 벗어나 진보면을 향해 가다 보면 왼편으로 마을을 안내하는 큰 간판이 있다. 청송심씨의 본향 덕천 충효마을의 모습이 이다. 청송의 서북단에 자리 잡은 덕천마을은 청송심씨의 *세거지로 지금도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에서 가장 큰 송소고택부터 송정고택, 요동재사, 찰방공 종택, 초전댁, 창실댁 등의 크게 7개의 고택으로 구성돼 있다.
덕천마을의 입구를 들어가면 마을에 중앙에 가장 크게 송소고택이 위치한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만석꾼으로 유명했던 심처대의 7대손인 심호택이 1880년대, 덕천리에 지은 99칸의 고택으로 일반가옥은 99칸 이상의 집을 지을 수 없었던 조선시대에 민가로써는 가장 큰 규모이다.
송소고택 대문채를 마주하고 왼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리면 단아한 고택 한 채가 눈에 띈다. 심호택의 차남인 심상광의 저택으로 현재는 증손녀인 심증옥(65) 씨가 관리하고 있다. 송정고택에서 태어난 심 씨는 40년간 서울생활을 하다가 4년 전에 다시 청송으로 귀향해 송정소택에 살고 있다. 송정고택 안채의 마루에 앉아 보면 안마당이 보인다. 안마당에는 송정고택의 마스코트로도 불리는 삽살개 ‘복돌이’가 고택을 지키고 있다.
송정고택의 뒤로 철기 이범석 장군의 장군길이 있다. 항일 운동을 했던 이범석 장군이 명상을 하던 길로 유명한 이범석 장군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덕천마을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덕천마을을 좀 더 새롭게 느끼려면 송소고택과 송정고택 앞마당에 갖춰져 있는 자전거를 이용하면 된다. 관광객들을 위해 마을 부녀회에서 마련한 자전거를 타고 덕천마을의 구석구석을 구경할 수 있다. 제일 좌측의 ▲소류정부터 ▲왕버들 길 ▲세덕사 ▲찰방공 종택 ▲요동재사 ▲창실고택 ▲조산무더기와 생태연못 제일 우측의 ▲경의재까지 구경하다 보면 마을을 찾은 사람들이 정자에 앉아서 쉬는 것을 볼 수 있다. 덕천마을을 찾은 날도 조산무더기 앞에 있는 그네를 타는 아이와 정자에서 가족들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청송, 자연을 노래하다

 

▲ 조산무더기 옆에 있는 큰 그네를 타면 덕천마을의 정경이 한눈에 보인다.


조금 더 고개를 돌리면 청송군을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자연을 더욱더 느낄 수 있다. 특히 청송군의 으뜸 매력은 경관이 빼어난 주왕산국립공원으로 떠나는 ‘게으른 산행’이다. 또한,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이 촬영된 장소로도 유명한 주왕산의 주산지는 천연기념물 왕버들 20여 그루가 자생하고 있다. 호수와 왕버들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은 주왕산을 찾는 관광객들이 꼭 들러야 할 코스 중 하나다. 주왕산 등산길의 입구에 있는 대전사에는 관광객들과 등산객들이 가을을 맞아 조금씩 울긋불긋한 단풍잎으로 옷을 갈아입는 나무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다.
느림의 미학을 배울 수 있는 슬로시티 청송답게 청송 곳곳에서는 다양한 체험행사를 진행한다. 부동면 신점리에 있는 청송백자전시장에서는 청송백자 만들기를 체험할 수 있다. 청송백자는 500년 역사의 서민들의 멋과 실용성을 담은 청송 대표 전통문화재로 손꼽힌다. 또한,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많은 천연염색은 파천면 덕천리에 있는 소슬자연빛깔 천연염색체험장에서 경험할 수 있다. 하늘로 솟는다는 ‘솟을’을 발음대로 불러 ‘소슬자연빛깔’로 불리는 청송의 천연 염색은 솟을대문처럼 과하지 않고 자연과 사람의 조화를 천에 표현하고자 한 의미가 담겨있다.
청송에 자리를 잡은 ‘슬로피플’도 눈에 띈다. ▲7대째 전통 한지 생산인 가업을 잇는 이자성(64) 한지장 ▲청송백자 기능보유자이며 청송군 향토문화유산 제1호인 고만경(84) 사기대장 ▲청송옹기를 만드는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이무남(75) 옹기장 ▲청송야송미술관의 야송 이원좌(75) 화백 등이 청송의 슬로피플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빨리빨리’를 외치는 현대에, ‘슬로시티’ 운동은 느림의 미학을 말한다. 느려서 행복한 삶, 인생의 마지막에 석양을 바라보듯이, 황홀한 마지막을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흐르는 물처럼 가다 서다, 진실한 삶의 의미에 대해 돌이켜보자. 어쩌면 우연히 우리 앞에 선 슬로시티를 통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거지: 특정한 성씨가 모여서 대대로 세거한 지역.

*낙동정맥: 낙동강 동쪽에 위치한 정맥으로 강원도 태백시의 구봉산에서 부산 다대포의 몰운대에 이르는 정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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