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양도할 수 없는 자유와 존엄이 무시되고 인간의 생명과 삶이 화폐의 가치로 환산되는 시대에 기독교적으로 학문함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기독교적 관점으로 세계 안을 들여다보고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설명하고 방어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궁극적으로는 세계를 내다보고 성서적 내러티브의 이해와 해석에 근거한 실재적인(realistic) 삶과 살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학문과 신앙의 통합이 지향하는 지점이다. 이 통합적 삶과 사역이 가능한가 질문하고 탐색하며 그 가능성을 실험하는 곳이 다름아닌 ‘큰 배움터’ 대학이다.
작고한 작가 박완서씨가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서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해 좌절된 자신의 대학생활의 여망을 피력한 대목이 있다. “막 대학의 문턱에 들어선 초년생”이던 박완서에게 대학은 “진리와 자유의 공간”이었고 “만 권의 책”이었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문장”이었다. 그녀는 그런 것들로 자신만의 아름다운 비단을 짜고 싶었지만 “막 베틀에 앉아” 그가 “꿈꾸던 비단은 한 뼘도 짜기 전에 무참히 중턱을 잘리고 말았다 전쟁은 그렇게 무자비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작가의 문학적 메타포인 “아름다운 비단”을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은, 소위 중산층의 ‘호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우리가 반드시 살아내야 할 실재적인(realistic) 삶과 살림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면, 대학은 우리가 앉아서 ‘아름다운 비단’을 짤 수 있는 ‘베틀’이 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성품을 반영하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규례를 존중하는 삶과 살림이라는 ‘비단’을 짜기 위해서 우리가 대학에서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한 중요한 전제로서 ‘의식’과 ‘인식’의 차이를 구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의식’은 마음의 작용이나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서 사회적 또는 역사적인 영향에 의해 형성되는 감정이나 견해, 사상들을 말하는 것으로 사회 의식, 역사 의식, 신앙 의식 등으로 나타난다. ‘인식’은 사물이나 사안의 의의를 바르게 이해하고 판별하는 마음의 작용을 가리키는 말로서 올바른 의식을 형성하는 토대가 된다. 역사나 사회, 신앙에 대한 인식이 부족할 때 우리의 역사 의식이나 사회 의식과 신앙 의식은 왜곡되기 마련이다.
정서와 열정의 파토스에 기초한 ‘의식’이 광범위한 자료와 정확한 논리를 바탕으로 한 분석과 종합의 과정을 거친 ‘인식’에 의해 검토되지 않을 경우, 우리의 의식은 혼돈 속에 머물고 만다. 역사나 사회 그리고 신앙의 실재에 관한 사실과 진리, 즉 로고스에 근거하지 않은 열정과 공감이라는 파토스는 일관성을 지닌 윤리와 구체적인 삶의 양상으로 드러나는 에토스로 구현될 수 없다. 한국기독교가 기독교 전래 초기의 역동성과 사회변혁에 대한 개혁적 동력을 잃은 것은 성서의 구원 서사인 창조-타락-회복의 패러다임에 바탕을 둔 세계관적 인식의 틀이 부실하고 이 세계관의 접점인 세계상의 확보가 부족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성숙한 신앙 의식이 협애한 역사 의식과 사회 의식과 결합할 때 나타나는 폐해는 말할 수 없이 크다. 우리가 아무리 말과 노래로 하나님의 영광을 외쳐대도 결과적으로 그분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상황을 안팎에서 목격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다. 이 혼돈스럽고 공허한 의식의 허우대로서 결코 주의 길을 예비할 수 없다. 한동을 ‘대학’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은 언제나 이 땅에 임하길 기도하고 운동하고 애써야 하는 하나님 나라의 지향과 그 가치에 상응해야 한다.

윤상헌 교수 (국제어문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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