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6월이다. 교회력에서 6월부터 10월까지는 ‘오순절 절기(Pentecost)’로서 성령의 오심을 기억하는 시기이다. 내가 20대이던 시절 고향 읍내 교회들에서 부흥회들이 많았다. 부흥회 설교자들이 흔히 외친 것은 ‘성령을 받으라’는 촉구였다. 무더운 여름밤 교회 안을 채운 신도들은 성령을 받기 위해 외쳐 기도를 했다. 그런데 막상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항상 분명하지 않았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이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의 계획이고(욜2:29; 사 32:15), 신약에서 예수님의 명(命)이다(요 20:22; 행 1:4-5, 8). 성경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과 일이 있는데 그것은 믿는 자를 ‘성령의 사람’으로 지으시는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을 지으시는 것이다. 성령을 받은 자는 이제 참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성령 안에서 자신도 ‘생명 있는 자’로 선 자며, 하나님의 진리와 구원을 효과 있게 전하여 남도 살리는 자이다.
 주 예수께서는 아직 ‘성령 받지 못한’ 미성숙 단계의 제자들이 세상을 바꿀 것을 기대하지 않으셨다. 아직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은 유아 단계의 제자들이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일을 할 것을 바라지 않으셨다. 아직 ‘성령 충만’을 모르던 제자들은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변화되지 않은 자아’에서 나오는 자기중심주의를 가지고 서로 헛된 경쟁을 했다(막 10:35-41).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제자들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일을 하기는커녕 우선 ‘자기 내세우기’에 급급했다(눅 22:24).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 후 ‘성령의 시대’는 시작되었다! 부활 후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분명하게 촉구하신 것이 “성령을 받으라(요 20:22)”라는 말씀이었다. 구약에서부터 던져졌던 하나님의 꿈이 실현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주의 말씀대로 제자들은 ‘성령의 사람들’이 되었고,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일’을 하는 자들이 되었다.
 왜 오직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 후 ‘성령을 받으라’라는 촉구가 있을 수 있었는가? 그 이유는, ‘성령을 받음’은 다른 것이 아닌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가 충만하게 마음과 삶에 임하시는 것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충만이란 ‘부활하신 예수로 충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며, 그분의 십자가로 충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을 상징하는 물(사 44:3; 요 7:38), 불(마 3:11), 바람(요 3:8), 비둘기(막 1:10) 등은 모두 부활의 예수와 그분의 십자가를 통한 성령의 일들을 시사(示唆)한다. 물의 씻음과 소생의 기쁨, 불의 변화와 열기와 빛, 바람의 능력과 변화, 비둘기의 온유와 순결 등은 모두 부활의 예수와 그분의 십자가가 주는 선물들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성령이 오시면 그분께서 예수님을 증언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던 것이다(요 15:26).
 요즘 성령을 받는 다는 것에 대한 이상한 해석들이 난무하고 있다. 부활의 예수와 그분의 십자가가 중심이 되지 않은 채 성령 체험을 어떤 ‘사물’을 받는 것으로(방언, 환상, 직통계시 등), 어떤 에너지 충전으로, 심리치료로 해석하는 것들이다. 이 오순절 절기에 성령을 부어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자!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시어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사 32:15),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해 주신다고(사 44:3) 예언했다. 십자가의 사랑은 얼마나 놀랍게 우리를 소생케 하는 하늘의 생수란 말인가!

김형겸 교목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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