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채플의 정체성을 논하다



지난 5월 15일 금요일, 교목실장실에 세 명이 모였다. ▲김형겸 교목실장 ▲총학생회 이재열 신앙국장 ▲기독교대학발전위원회 안태현 위원장은 1시간 30분가량 한동대 수요채플의 의미와 현황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좌담회의 진행은 대학보도부 박천수 기자가 맡았으며, 좌담회에서 나온 외국어 표현은 한국어로 옮겨 적었다.

Q 한동대 수요채플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총학생회 이재열 신앙국장(이하 이) 제가 생각하기로는 예배라는 점과 (한동대) 공동체라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채플이라는 곳은 분명히 일차적인 목적으로는 예배지만, 동시에 한동대 구성원들이 공동체 안에서 구성원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한동대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이 채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구성원들이 이것은 공동체성을 확인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면 정체성이 그렇게 될 테고 많은 사람들이 예배로 생각하면 예배의 성격이 더 강해지면서 그 의미가 더 살아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기독교대학발전위원회 안태현 위원장(이하 안) 예배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에 입장에서 봤을 때, 예배는 곧 삶이죠. 따라서 수요채플이 어떤 특성을 가지기보다는 기독교가 갖고 있는 핵심가치에 대해서 같이 공유할 수 있는 장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형겸 교목실장(이하 김) 대학이라는 특수적 조건 때문에 우리가 소위 말하는 정의로서의 예배는 아닐 수 있어요. 자발적이고 목사님 중심으로 운영되는 예배의 성격이 있는데, 우리 채플은 그런 성격의 예배는 아니지만 일반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의 핵심적인 복음을 유지하기 때문에 예배라 부르는 것이죠. 또한, 학생들이 지적해준 공동체성 아니면 기독교적 정체성 이런 모든 것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유지해갈 다른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Q 설문결과 학년이 올라갈수록 수요채플 만족도는 떨어집니다.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일단 반복되는 이야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채플설교에 반복됨, 결국에는 3년 동안 비슷한 일상 속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듣는다면 만족도가 당연하게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모든 것들에서 새로움이 필요한 것인데 그 새로움이 느끼기에는 아마도 학생들에게 임팩트가 좀 적지 않았나 생각이 드네요.
한편으로는 학생들이 1학년에서 4학년으로 가면서 생각이 많이 성장하기 때문이 아닐까. 채플의 메시지는 전체학년 중간지점을 건드릴 수밖에 없잖아요. 학년이 올라가면서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나 생각하거든요. 때문에 채플자체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지는 것이 좀 어쩔 수 없지 않나 싶어요. 굉장히 어려운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들은 설교를 준비하신 부분에 있어서 어느 정도 수준의 기준점을 잡고 계신지 좀 궁금한….
목사님들 사이에 이런 수준에서 해야 되겠다는 합의점은 없습니다. 우선, 일치하기가 어렵고, 워낙 설교라는 게 주관적이고, 영감의 차원에서 기도하면서 얻는 것들이라서 수준의 일치는 매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나는 우선 만족도가 내려간다는 사실에 대해서 교목실 목사로서 미안하고, 슬프고, 안타깝게 느끼죠 사실은. 이미 지적한 문제 때문에 만족도가 내려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이런 통계는 교목실에게 좋은 하나의 도전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Q 어떤 설교자 및 강연자가 한동대에 오면 좋을까요?
학생들이 전반적으로 권위를 인정하실 수 있는 분께서 올라오셔서 강연을 하시거나 설교말씀을 전해주시는 게 옳다고 생각을 해요. 기독교인 학생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 학생들도 채플 시간이 굉장히 진지한 시간이라는 것은 알고 있거든요. 재미있는 공연도 의미가 있지만, 오히려 더 깊이 있는 메시지를 설교하시는 분을 선정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교목실 목사님들께서 많은 메시지를 전달해주셨으면 하는 게, 실제로 학생들이 교목실 목사님들께 여러 수업들을 배우면서 우리 스승으로서의 권위를 인정하고 배우고자 하는 그 마음이 표현된 것이라 생각해요. 많은 학생들이 총장님께서 나오셔서 이야기를 할 때 사실 불편해하잖아요.
한동대의 현실적인 문제를 적나라하게 짚어주실 수 있는 분들이 필요하죠. 한동대학교의 정세를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비판할 수 있는, 한동대학교의 방향성에 대해서 제시해 주실 수 있는 그런 설교자와 강연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슷한 선상에서, 생각보다 비기독교인들이 한동대학교 기독교문화와 채플, 이런 부분에 대해서 정말 날카롭게 간파하고 있는 것이 정말 많더라고요. 실제로 제 친구 중에서 비기독교인에서 기독교인이 된 경우가 많은데, 그 친구들이 건설적인 비판을 할 수 있는 힘이 엄청나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대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결국 기독지성인들인데, 그런 부분에 있어서 한동대를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그런 설교자와 강연자가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교목실 목사님들이 책임감을 느끼고 더 잘하며, 신중하게 고려해 좋은 강연자를 모시는 것이 한동대 공동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우리는 대학이잖아요. 따라서 가능하면 다양한 관점을 폭 넓게 제시를 해줄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두 학생이 얘기한 대로 권위도 있고, 또한 한동의 내에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얘기해 줄 수 있는 이런 강사도 참 필요하죠. 나도 같은 생각입니다.

Q RC 채플 분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RC의 전면화가 되기 전까지는 어떤 설교를 학생 전체가 토론할 수 있는 장이 만들어졌었어요. 그런데 RC 채플 분할이 되면서 같은 RC가 아니라면 대화의 주제 자체가 달라지다 보니까 학생 전체 토론장 형성이 되지 않아요. 즉, 한동대가 전체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가 사라졌다는 것이죠. RC가 너무 급하게 만들어져서 이런 부분을 놓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드네요.
목사님이 이제 RC 채플로 할 때는 RC 담당 목사님께서 주로 말씀을 많이 전해주시게 되잖아요? 근데 우리 학교는 초교파잖아요? 그래서 목사님들마다 사실은 신학적인 입장 또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 등이 매우 다양한데, 한 목사님만의 이야기만 듣다 보면 조금 아쉽죠. 저는 이제 10학번이다 보니까 그 RC 이전 채플도 많이 들었어요. 그 때 개인적으로 느꼈던 것 중에 하나는 ‘아 목사님들의 메시지가 정말 다양하다, 목사님들의 입장이 정말 다양하다’ 였어요. 혹시 기억하실 지 모르겠지만, 2010년도에 데이비드 오어라는 분이 ‘이제 한국에서 전쟁 일어난다’고 예언을 했을 때, 어떤 목사님께선 ‘그 메시지가 사실이라고 믿는다며 회개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이런 메시지를 전하셨어요. 그런데 다른 목사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예언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다른 메시지를 또 전달하셨죠.
이게 대학생으로서 많은 고민들을 해 볼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이건 뭐가 옳은 거지? 우리가 둘 다 권위를 인정하는 목사님 두 분 다 저렇게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저는 이때 기독교인으로서 많은 고민들을 해 볼 수 있었던 거 같아요. RC에서 한 분의 일관성 있는 설교를 듣는 장점이 있지만, 좀더 다양한 메시지와 다양한 신학적 입장을 많이 들을 수 있다면, 더 좋은 배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공동체의 중심에는 예배가 있어야 한다고 느끼기에 RC에서 예배를 봐야 하는데, RC에서 예배를 따로 보고 또 채플도 보면 중복이 되죠. 그래서 RC에서 채플 예배 일부를 RC가 보겠다고 요구가 왔고요. RC 분할 채플을 통해 얻는 것 잃는 것을 다 측정해야죠. 특히 잃는 것이 무엇인가를 더 생각하면서 그것에 대한 강화, 대책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Q 학생이 수요채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 어떤 것이 필요할까요?
공공성 있는 메시지들을 전달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신앙이라는 게 개인의 영혼구원도 엄청 중요하지만, 학생들은 동시에 그것이 사회에서 어떻게 발현되고 발휘할 수 있을지 많이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이슈가 조금 예민한 이슈가 돼 있어요, 기독교에서. 사회 정의 문제인데 예수그리스도의 하늘나라 천국의 메시지가 개인 구원뿐이냐, 사회의 예수님의 말씀의 법칙이 사회 속에 침투돼서 소금과 빛처럼 사회를 바꾸는 이런 것으로 가야 하지 않느냐, 이런 것에 있어서 사실 그런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죠. 건강한 기독교는 개인 구원과 사회적 정의 차원을 다 양쪽으로 가져야 정상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소금과 빛처럼 사회를 바꾸어야 하지 않느냐 라는 것에 부정할 사람은 없죠. 가난한 자들 권력 박탈된 자들의 권리문제도 당연히 관심 가져야 하는데, 혹시 그것이 기독교의 전부고 핵심인 것처럼, 마치 기독교를 대변하는 것처럼 되면 그것도 좀 저는 걱정스러워요. 이런 우려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주고 싶었어요.
 

저작권자 © 한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