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 이 분의 특별함이란 (1) ‘신’이시면서도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고, (2) 세상에 오실 때 사회적으로 ‘낮은 계급’의 가정을 통해 오셨다는 것이며, (3) ‘낮음’과 ‘평범’의 사람들을 영원한 가치의 존재들로 보시며 사역하셨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분명하게 드러내신 것들 중 하나가 ‘하나님의 관점’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최고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그분은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께서 천국의 ‘재목들’로 보신 사람들은 ‘가난한 마음’으로(마 5:4) 하나님의 구원을 열망하던 자들이었다. 그분은 말하자면 천국에서 내려오시어 천국의 빈자리와 천국의 요석들을 채울 인간 피조물들을 발견하여 모으는 일을 세상에서 하신 것이었다. 그것을 하시는데 그분이 기준으로 삼으셨던 것이 ‘가난한 마음’이었다.
 감격스런 찬송가 가사가 있다.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 귀중한 보배 하나라도 남김없이 다 찾으시리 … 정한 보배 빛난 보배 주 예수의 보배 하늘나라 두시려고 다 거두시리 … 샛별같은 그 보배 면류관에 달려 반짝반짝 빛나게 비치리로다.” 주 예수님의 눈에 천국을 채울 ‘보석들’은 이곳저곳에 박혀있었다. 그분께서 그 ‘보배들’ 찾아 만난 곳은 화려한 궁전과 웅장한 성전 안이었기 보다는 갈릴리 빈민촌들과 먼지나는 길거리와 범인(凡人)들의 주거지에서였다. 그분께서는 세상의 권력자들과 자만으로 부풀어 있던 부자들과 종교적 엘리트들이 무가치하게 여겼던 ‘소자들(빈자들, ‘죄인’들, 장애인들, 약자들)‘이 어떻게 하늘나라의 이 자리, 저 요석에 적절할지를 보셨다. 골동품 가게에서 먼지와 때로 얼룩진 ‘값진 도자기’를 찾아 들고 기뻐하는 골동품 전문가처럼 그분께서는 이렇게 부서지고 저렇게 때묻은 인간들을 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참 가치를 보시면서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다: “네 믿음이 크도다(마 15:28)”,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막 12:34)”,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
 그분께서는 ‘가난한 마음’으로 메시아를 열망하던 어부, 세리 등 평범한 청년들을 ‘하나님나라의 일’로 부르셨다. 그들에게 ‘사람을 낚는 법’을 가르치어 하늘나라 일꾼으로 만드셨다. 세상의 모든 ‘평범한 것들’이 그분의 눈에는 평범 이상이었다. 그분께서는 씨앗, 맷돌, 새, 꽃, 바람 등 평범한 것들을 비유로 하여 영원한 진리를 가르치셨다. 놀라운 것은 그 분이 ‘만지신(touch)’ 모든 ‘평범한 것’이 ‘새 차원’으로 승화되며 변화되었다는 점이다. 그분의 말씀 속에서 ‘평범한 새’와 ‘평범한 꽃’은 하늘나라를 드러내는 수단들이 되었다. 그분의 말씀으로 물은 포도주가 되었다. 그분께서 만나주신 부자 삭개오는 탐욕의 삶을 청산하고 재산을 하늘나라를 위해 쓰는 사람이 되었다. 그분께서 이끄신 어부와 세리들은 ‘복음의 사역자’들이 되었고, 그가 치료해주신 귀신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는 ‘사랑’이 중심에 심어진 ‘건강한 사람’이 되었다. 그분께서 만나주신 바울은 자신이 가진 종교적 배경, 지성, 사회적 신분 모두를 최선으로 활용하여 ‘십자가의 도(고전 1:18)’를 탁월하게 신학적으로 정립하는 사명을 감당하였다. 당신은 이 하늘의 구원자를 만난 자인가? 이 분께서 보셔서 ‘가난한 마음’의 소유자인가? 이 분의 은혜와 권능의 ‘터치’로 새 사람(엡 4:24)이 된 사람인가? 아니면 ‘방이 다 찬 여관’처럼 이 분께서 들어오실 자리를 여전히 거절하고 있는 자만의 사람인가?

김형겸 교목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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