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회 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잘 하는 것 하나가 있다. 그것은 내 맘에 드는 신(神)을 제조하는 일이다. 인간은 그야말로 ‘신 만들기’ 선수들이다. 종교 관련 책 하나를 살펴보니 고대 이집트(Egypt)에만 40여 종류의 ‘신들’이 있었다. 그 신들 중에는 나일 강의 여신인 아누켓, 재칼 모양의 아누비스, 매 모양의 호루스, 악어 모양의 소벡, 인간 모양의 오시리스, 주술과 치료의 여신인 아이시스, 태양의 신인 라, 황소 모양의 아피스 등이 있다. 이런 나라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민족이 이스라엘이었고 그 민족을 끌고 나와 광야 여행을 한 지도자가 모세였다. 물론 인간들의 ‘신 만들기’ 작업은 이집트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들어가 정착하려던 가나안 지역도 다양한 신들의 전시장이었다. 그 신들 중 몇 이름들이 성경에 나오지만 - 바알, 아세라, 아스다롯 등 - 우가리트(Ugaritic) 문서에 의하면 고대 가나안 지역에는 230여 종 이상의 신들이 있었다. 모세와 함께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십계명’의 제2계명에 하나님께서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섬기지 말라고(출 20:4-5) 단호히 말씀하신 것이 이해가 된다.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식으로든 ‘형상화’하는 것을 엄격히 금한 것이 ‘성경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분명히 하신 것이었다.
인간의 ‘형상’에 대한 집착의 열기는 역사를 내려오며 식을 줄을 몰랐다. 힌두교의 사원들에는 부라마, 비쉬누, 시바 등의 신들이 ‘만들어져’ 모셔있고, 중국 도교 사원에는 위엄있는 옥황상제 초상화가 걸려 있으며, 불교의 사원들은 ‘거대 불상’ 세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중세의 가톨릭교회 역시 형상 추구에 집착했다. 소위 ‘성물(relics, 베드로 허리띠, 십자가 조각 등으로 믿어지는 것들)’ 숭배가 가톨릭교 안에서 중시돼 왔고, 성자나 마리아의 형상들이 성당 안팎에 세워져 왔다.
21세기 현대에 “나는 종교가 없다”라고 하는 사람들은 물론 어떤 형상을 신으로 예배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은 이제 미신과 원시종교에서 떠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세상을 본다고 말한다. 그런데 자신들은 이성적으로 쿨(cool)하게 사물을 본다는 현대인은 과연 ‘신 만들기’ 습성에서 자유롭단 말인가? 교회개혁자 루터(M. Luther)에 의하면 그렇지도 않다. 루터는 십계명에 대한 ‘대교리문답’에서 “신이란 인간의 마음이 전적으로 의지하는 대상”이라고 정의한다. 루터는 그러한 대상의 예로 기술, 권력, 도덕적 우월, 우정, 명예 등을 언급한다. 루터는 사람들이 이런 대상들 - 즉 우상들 - 을 중심으로 자신의 안정을 확인하며 이 대상들을 잃으면 불안해 한다고 지적한다.
현대인은 스스로 자신하는 것만큼 ‘신 만들기’ 습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현대에 ‘우상’의 숫자는 더 불어나지 않았나싶다. 인간의 피할 수 없는 딜렘마란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신’ 대신 다른 어떤 ‘대상’을 신처럼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들어진 신’을 믿는 자들을 비판하는 순간 자신이 믿는 신 하나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신에 대한 신앙’을 피할 수 없도록 지어진 존재이다. 성경의 경고란, 당신이 신을 잘못 선택하면 그 신(우상)과 함께 망한다는 것이다(역하 7: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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