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또, 언제나 그랬듯, 학교는 일방적인 통보를 준비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학업과 진로에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수업에 관해서다. 교수들의 의무 강의 시수를 18학점에서 15학점으로 줄이고 온라인 강의를 대폭 확대한단다. 학부장 회의를 통과하고 학부 별로 가능한지 교수들이 시뮬레이션을 돌릴 때까지 학생들은 아무도 이 사실을 몰랐다. 학생 대표기구인 총학생회도, 심지어 교과과정에 있어 학생과 학교 사이의 이견을 조율하는 커리큘럼개선위원회마저도 말이다. 학교 당국과 교수에게 학생들과 밀접하게 연관된 이러한 사안조차 학생들의 의견을 먼저 물어달라 하는 것은 지나친 요구일까?
 비전 2020 이행도와 관련한 본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 보직교수는 교수와 학생을 ‘부모와 자식’ 관계로 비유했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집안 사정을 다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맥락에서다. 교수 및 학교 당국이 학생에게 부모만큼의 자기희생을 하고 있다는 전제를 깔지 않는다면 낯뜨거워서라도 할 수 없는 말이다. 이 비유를 따른다 해도, 그가 말하는 부모란 ‘자식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식에게 윽박지르며 자기 자신을 강요하는 부모와 다름없어 보인다.
 “인간의 정신은 과연 우리가 옳은지를 살펴보는 내적 의심이라는 작은 불빛을 통해서만 빛날 수 있다. 반면 자신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완전히 확신하고 있는 자들은 내적으로는 어둠에 가득 차 있고 외적으로는 잔혹함과 고통, 불의로 세상을 어둡게 한다.”
 1930년대 시카고 빈민 대중운동을 주도했던 사울 D. 알린스키가 그의 저서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에서 한 말이다. 도덕적 우월감. 과도한 자기 확신. 그리고 자신의 행위가 ‘당신들을 위한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자들은 그 속에 분명 음흉한 욕망을 숨기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마치 자기 자신을 강요하는 부모가 자식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는 것처럼.
 자신을 부모라고 생각하는 학교 당국과 교수에게 ‘부모에게 대화를 청하는 자식들’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고개 숙이기를 청한다. 학생들의 옳음은 당신들의 옳음과 다를 수 있으며, 학생들이 꿈꾸고 바라는 한동대는 당신들이 그리는 한동대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 대화 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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