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뽕’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국가’와 ‘히로뽕’의 합성어다. 국가의 우월성과 위대함이 마치 자신에게 마약을 투여한 것처럼 기분이 좋은 상태로 느껴지는 것을 의미한다.
 ‘한뽕’은 한동에 대한 마약이다. 한동을 대단하다고, 다른 대학과 다르다고 느끼며 우월함을 내세운다. 지금 한동은 한뽕에 취해있다. 술과 담배는 캠퍼스에서 금지지만, 한뽕은 학생과 학교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얼마든지 허용된다.
 한동대는 사랑입니다. 한동대는 정직과 믿음이 넘칩니다. 한동은 다른 학교와 다릅니다. 주변 사람에게 한번씩 물어보자,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아마 재학생의 대답은 각자 다를거지만, 최소한 실제로 학교가 100%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안다. 불완전하게 인정한다. ‘물론 그렇긴한데, 그래도 다른데보단 나은거 같아’라고 대답하며, 어느 적정선으로 타협한다.
 어느 정도 괜찮은 정직과 믿음, 사랑이 있을 수 있나? 있을 수 있다 치자. 어느 정도의 정직과 믿음, 사랑은 우리가 바라는 건가? 바라지 않기에 현실이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정해버리면 내가 부정당하는 것 같아 스스로 마약에 취한다.
 인지부조화다. 한뽕은 인지부조화 상황을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기제다. 한뽕에 취했더니 한동대에서 ‘사랑, 믿음, 정직’은 군데군데서 보인다. 좋은 것만 보인다. 그렇다보니 좀 그렇지 않은 일을 겪거나 얘기를 들을 땐 불편하다.
 한뽕에 취한 상태는 꽤 오래 지속된다. 외부 반응과 주변에서 한동의 ‘사랑, 정직, 믿음’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빈도가 잦을수록 한뽕을 더 자주 찾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주 맞는 만큼 더욱 강렬한 엑스터시를 원한다. 그래야만 반응하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상황보다 이를 받아들이는 태도다. ‘잘못’을 ‘잘못’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잘못을 항상 ‘실수’라 치부한다. 특히 학교는 ‘잘못’이 있어도 다음부터 그러지 않겠다고 ‘사과만’ 한다. 다음은 영원히 오지 않는 ‘다음’이 돼버렸다.
 가장 먼저 학생에게 직접적인 영향이 있을 정책을 시행하면서 일정 수준의 의결까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 일하다 보면 바쁘다. 바쁜거 안다. 다 우릴 위한거고, 다 학교 잘 되라고 하는거라고 한다. 그런데 나만 학교를 위한 일을 하는거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은 이런 학교의 ‘잘못’을 한 두 번도 아닌데 ‘다 우리 위한거다’보니 어쩔 수 없었던 ‘실수’라며 넓은 아량으로 포용한다. 하지만 이 포용력은 진정한 포용이 아닌 한뽕에서 비롯한 외면에 불과하다.
 인지부조화가 빚어낸 비극이다. 결국 잘되길 바라는건데, 뭐가 문제냐고? 이 한뽕에 한 번, 두 번 취하다 보면, 학생은 학교와 영원히 미뤄지는 ‘다음’에만 얘기할 수밖에 없다. 거듭된 실수가 쌓여 잘못이 되는데, 그때도 실수로 넘어간다면 잘못은 영원히 고칠 수 없다. 한동을 위한답시고 문제를 덮어두면 한동을 망치는 지름길로 가는 것뿐이다.
 그래도 한뽕에 취하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다. 오늘 당신, 한뽕 한 대 하실래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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