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입니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맘스에서 비빔밥을 먹다가 그만 입 안을 깨물었거든요. 똑같은 지점을 연거푸 세 번 깨물고는 이게 다 비빔밥에 고기가 안 들어간 탓이라며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이빨 자국이 남긴 상처는 이내 동그랗고 하얀 친구들이 되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신경 쓰이고 밥 먹을 때는 무척이나 따갑습니다. 아프다고 인상을 마구 찡그리고, 왜 그러냐는 질문에는 입술을 잡아내려 보여줍니다. 으 하는 감탄사가 오고가고, 식사는 재개 되고, 아픔은 여전히 내 것으로만 남습니다.
 내가 너가 아니듯, 단 한순간도 다른 이의 고통이 내 것이었던 적이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 입니다. 3월과 4월의 문턱에서 묵상한 예수의 십자가 고통이 얼마나 크고 무거운 것이었든 간에 내 입속에서 지금 느껴지는 이 고통이 훨씬 더 생생하고 실제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삶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하나 봅니다. 함께 사는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아픔의 자리에는 나 홀로 있을 수밖에 없기에 우리는 이기적입니다. 이 아프다는 징징댐이 손에 대못이 박혀있는 청년 앞에서 낼 소리인가 싶긴 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여기저기 어찌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 입니다. 누구도 시간을 돌이킬 수 없고, 돌이킨다 한들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없습니다. 1년 전으로 시간을 거스른들, 이곳 포항에 있었던 내가 그곳 진도 바다 아래에 있었던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어쩔 수 없어하며 밥이나 먹었겠지요. 그날도 그랬고, 그 이후의 1년도 그러했듯이.
 그러나, 어찌할 수 없음 속에서 어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부와 정치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며 안타깝다 말하고는, 이내 생활의 리듬을 되찾고 바쁜 걸음을 다시 재촉했습니다. 유가족들은 진실을 밝혀내는 작업을 정부에 요구하였으나, 그들은 요구 하지도 않은 배상금 보상금을 들먹거리며 진정성을 호도했고, 몇몇 이들은 지겨우니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며 막말했습니다. 그러나, 가족을 잃은 처절한 아픔, 결코 내 것일 수 없는 그 고통 속으로 들어가 사도바울의 말씀대로 그 울음들과 함께 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업을 내려놓고서까지 함께 싸우는 사람들, 유가족과 함께 목숨을 걸고 곡기를 끊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왜일까요.
 상상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다 아래 있었던 아이들의 두려움과 공포를 상상하고, 아이를 그토록 허망하게 떠나보내야 했던 부모들의 절망과 안타까움을 상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상상 속에서 다른 사람의 경험인 고통과 내 삶의 고통을 연결 짓고 그 느낌에 공감하게 됩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과 웃는 자들과 함께 웃는 것은 공감이라는 동전의 양면입니다. 벚꽃과 함께 흩날리는 우리의 재잘거림과 깔깔댐이 혹 공감의 결여, 상상력의 빈곤은 아닌지요. 웃음을 무한히 긍정합니다. 그러나 한쪽 면이 훼손된 동전은 그저 모조화폐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실의 어찌할 수 없음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이 상상력에 있다는 말은 예술가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평범한 목수의 아들이 세상으로부터 외면 받은 자들을 바라보며 품었던 상상과 공감, 그것이 세상을 구원했습니다. 여전히 제 입안은 따갑고 쓰라리지만 더 큰 아픔을 감히 상상해 보려합니다.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는 우리의 봄날이 상상력으로 충만해지기를, 상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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