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어떻게 불타 없어진, 아니면 전쟁에서 썩어 없어진 몸을 다시 형성한다는 건가?” 이 질문은 뉴스위크(Newsweek)지 종교난 기자 리사 밀러(Lisa Miller)가 뉴스위크에 실은 자신의 글에서 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밀러는 주저 없이 답한다. “나로 말하면 그런 것 믿지 않는다(For my part, I don't buy it.). 이러한 밀러의 부활에 대한 회의(懷疑)는 예수께서 사역하던 당시 사두개파 사람들의 입장이기도 했다. 사두개인들은 자식 없이 죽은 형의 아내를 동생이 맞아 대를 잇게 해 주는 모세의 규례를 예로 들면서 한 여자가 일곱 형제의 아내이었다면, 천국에서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냐고 질문했다(눅 20:33).
뉴스위크의 밀러(Miller)에게나 2,000년 전의 사두개인들에게나, 그리고 부활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죽음으로 흩어져버린 인간의 몸이 다시 ‘재결합’된다는 것은 인정될 수 없는 환상(fantasy)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을 믿지 않는 이 사람들을 너무 탓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솔직히 하나님의 권능에 의한 부활을 믿는다는 믿음의 사람에게도 죽어 없어진 몸의 ‘재결합’ 문제는 풀리지 않는 숙제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부활이 참으로 무엇인지에 좀 더 가깝게 접근하기 위하여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저 사두개인들은(그리고 아마도 밀러도) 부활의 본질에 대하여 전혀 감(感)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부활, 즉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은 현생에서의 ‘생물학적 몸’이 재현되고 유지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 그리고 솔직히 우리 모두의 상식에 - ‘다시 살아나는 일’은 그러한 생물학적 재현 이상 다른 어떤 것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전부는 지금의 ‘물리적 몸’뿐이기 때문이다.
부활의 본질에 대한 힌트(hint)는 사두개인들에게 준 예수님의 대답 속에 있다. 예수께서는 부활한 몸은 더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몸은 아니며, 다시 죽는 몸도 아니며, 천사적인 새 몸이라고 대답하셨다(눅 20:34-36). 주님의 이 대답이 함축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부활의 몸’이라는 것은 현생의 물리적, 생물학적 체계와 차원을 뛰어 넘는 ‘영원’에 속하고 어울리는 ‘새 몸’이라는 것이다. 마치 물속의 애벌레가 잠자리로 ‘변화’하여 공기 속을 비행하듯이 말이다(부활에 대한 희미한 암시를 예로 들자면 말이다).
예수님의 설명을 사두개인들이 얼마나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밀러(Miller)나 다른 회의주의자들이 예수님의 설명을 수긍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부활은 어차피 ‘이론’으로 파악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께서 분명히 죽은 한 사람을 영원과 천국에 어울리는 ‘새 몸’으로 부활시키는 일을 실행하신다면 어떻겠는가? 누군가가 그 ‘부활한 사람’을 실제로 만나보고, 그분의 ‘부활한 몸’이 얼마나 놀라운 ‘새 몸’인지 목격한다면 어떻겠는가? 예수의 제자들과 바울은 자신들이 그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한다(고전 15:1-8). 그들에게 ‘부활’은 더는 이론이 아니었다.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오셨다가 가시는 그분의 ‘영광스런 몸’을 본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보았다. 죽음보다 강한 하나님의 권능을 보았다. 그들이 받은 부활의 충격과 넘치는 기쁨과 확신의 소망은 ‘기독교’의 출범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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