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는 말에 동의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나는 고조부, 증조부의 성함을 모른다.
 지난겨울, 흥미 있는 칼럼이 소개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기억전달자>, 1994년 뉴베리 상으로 알려진 Lois Lowry의 소설 <the Giver>를 각색한 영화다. 인간의 끝없는 악과 폭력을 경험한 어느 먼 미래, 차별도 고통도 없이 모두가 행복한 완벽한 시스템을 갖춘 이상사회가 건설된다. 공동체 모든 구성원에게 기억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기억이 없어지니 감정도 선과 악의 판단도 없이 사회가 정해준 대로, 지시받은 대로 살아간다. 조작된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공동체로부터 제거된 ‘기억’은 선택된 단 한 사람에게만 전수 된다. 그의 역할은 'the giver', 기억전달자이다. 앞선 백발의 기억전달자가 다음세대 기억전달자의 손을 부여잡고 혼신의 힘을 다해 기억을 전달한다. 사랑, 행복과 같은 따뜻한 기억뿐 아니라 전쟁, 살인 등 잔혹한 고통의 기억까지 전달받으며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에서 차세대 기억전달자는 그곳을 탈출해 공동체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 회복시킨다.
 목사라는 직업병인가보다. 스크린 위로 성서의 이야기가 중첩된다. 앞선 세대가 품었던 자유에 대한 꿈, 민족적 정체성이 반복되는 제국의 노예생활에 묻혀 잊히던 어느 날,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신다. 그리고 제국을 탈출해 하나님과 맺은 공동체적 기억, 언약을 회복한다. 모세를 ‘기억전달자’로 부르신 것이다. 모세는 약속의 땅을 앞두고 공동체적 기억을 회복한 백성들을 향해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옛날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라”고 십여 차례 신신당부한다(그래서 신명기가 되었다). 차세대 지도자 여호수아가 민족을 향해 던진 첫마디는 “기억하라”는 명령이었다. 기억전달자가 사라진 포스트 여호수아 공동체를 사사기는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라고 기록한다. 이는 기억을 잃어버린 백성들의 현실을 폭로하는 표현이다. 예수님은 이 땅을 살아갈 제자들과 빵과 잔을 나누시며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do this in remembrance of me)고 명령하셨다. 앞선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자신이 경험하고 배운 기억을 왜 '직접' 전해야 하는지 깨닫게 해 주는 대목은 성경 곳곳에 등장한다.
 한국어로 '기억하다'는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간직하거나 생각해낸다는 과거지향적 단어다. 신약성서의 헬라어는 두 가지 동사로 구분되어 있다; 아남네시스(anamnesis), 프로렙시스(prolepsis). 두 단어 모두 기억을 현재 안으로 끌어와 소급하여 통합하지만 전자는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오늘로 끌어와 현재화하고, 후자는 미래에 있을 사건을 오늘로 끌어와 현재화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기억하며 오늘을 살아내고, 앞으로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인지를 기억하며 오늘을 살아내는 것이 진짜 그리스도인이다.
 한동에서 4000명이 함께 생활하며 관계한다고 해서 저절로 공동체가 되는 건 아니다. 기억을 함께 공유하지 못하고, 그 기억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면 집단과 단체일 뿐이다. 스무 살 약관 한동, 지난 20년을 회상하고 또 앞으로 나아갈 20년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참된 공동체는 “함께 기억을 공유하는 공동체”다. 나는 기억전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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