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그 후 대한민국을 뒤덮은 노란 추모 물결. 못다 핀 304명의 꽃을 기억하며 잊지 않겠다고들 했다. 그러나 실종자•희생자•생존자 가족들이 왜 삭발을 하고, 왜 꼬박 40km를 걸었는지 이유를 아는 이도, 알려고 하는 이도 줄어가고만 있다. 세월호 참사는 바쁜 인생, 바쁜 대한민국에 의해 잊혀 간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모든 자료를 남기려는 움직임은 ‘416기억저장소’에 의해 시작됐다. 특별히 416기억저장소는 지난 3월부터 ‘기억과 약속의 길’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희생 학생들의 빈방을 찍어 전시한 <아이들의 방>부터 ▲단원고 ▲합동분향소 ▲고(故) 신호성 군 어머니와의 대담회까지. 416기억저장소는 아이들의 흔적을 밟아봄으로써 세월호 참사를 잊지 말아달라 이야기한다.

   
▲ <아이들의 방> 전시회장. 벽면의 검푸른 색은 세월호가 잠긴 진도 팽목항 바다를 뜻한다. 사진 옆 하얀 글씨는 단원고 아이들이 평소에 엄마, 아빠에게 했던 말들이다. 이영건 사진기자

아이들 없는 빈방에서 마주한 아이들
전시회는 피해학생이 가장 많이 살았던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의 낡은 상가에서 열렸다. 상가 3층 자그마한 공간에서 사진 전시회 <아이들의 방>을 만났다. 사진 속의 빈방에는 아이돌 포스터, 두 대의 모니터, 커다란 곰돌이 인형, 자전거 등 54명 아이들의 특징이 그대로 묻어났다. 아이들이 잠겼던 혹은 아직 잠겨있는 바다를 상징하는 검푸른 벽에는 아이들이 부모님에게 했던 말이 적혀있다.
 “나는 아이들이 너무 예뻐요. 유치원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많이 사랑할 거야”, “엄마, 내가 새로운 게임을 만들었는데, 접속자가 아주 많아. 신기하죠?”, “엄마, 벚꽃이 너무 아름다워요. 내년에도 꽃길 산책하자.”
 전시회를 다 볼 무렵, 416기억저장소 김종천 사무국장은 가장 먼저 희생자로 발견된 고(故) 정찬우 군의 여행가방을 가져왔다. 아이들의 유품은 대부분 펄 속에서 나와 5~7번은 손빨래로 빨라야 어느 정도 복원된다. 그럼에도 찬우 군의 여행가방에서는 여전히 펄 냄새가 났다.
 “사진을 보면 유품을 정리한 방과 아닌 방으로 나뉩니다. (유품을 정리한) 부모님들은 유품을 소각하고 이사를 하면 아이들이 잊힐 줄 알았겠죠. (그럼에도) 잊지 못하고 새로운 집에서 아이의 방을 다시 만드는 분들도 여럿입니다.”

   
▲ 단원고. 바람 빠진 풍선 뒤로 보이는 아이들 책상에 선물이 한아름 놓여 있다. 책상을 가득 채운 것은 아이들을 향한 가족, 친구들의 그리움이다. 이영건 사진기자

희생된 아이들 품은 단원고 교정
마치 아이들이 등교하듯, 아이들의 방에서 나와 단원고로 갔다. 수학여행에서 돌아왔어야 했던 2학년들의 교실, 2~3층은 아직도 예전 그대로였다. 책상에 붙어있는 아이돌 사진, 직접 만든 달력, 교탁에 붙어있는 자리배치표 등이 평범한 교실과 똑같았기에, 금방이라도 수업은 시작될 것 같았다.
 희생∙실종 학생의 책상에는 국화꽃과 친구들이 올린 선물들, 편지 꾸러미 등이 놓여 있었다. 선생님의 자리, 교탁도 마찬가지였다. 단원고 학생들이 잊지 않고 희생자의 생일을 챙기고, 친구들과 선생님을 찾아 매일 발도장을 찍고 간 것이다. 반면, 생존 학생의 책상 위는 깨끗했다.
 생존 학생 중 일부는 아직도 죄책감에 이 교실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생존 학생의 아버지이자, 416가족대책협의회 박석순 씨는 “이런 교실, 이런 학교 다시는 만들지 않아야죠. 거리에 있는 부모님들에게 힘을 실어주세요”라면서도 “생존자들도 잊지 말아 주세요. 이 아이들도 지켜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생존자가 단 한 명인 교실도 있다. 7반은 학급인원 33명 중 32명의 아이들과 선생님이 배에서 나오지 못했다. 드문드문 빈자리, 즉 생존 학생 자리가 있던 다른 교실과 달리 7반은 3분단 전체가 희생 학생 자리였다.
 “1반이 가장 생존자가 많았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물이 가장 먼저 들어와 배가 정말 침몰할 수 있겠다는 위험을 감지했던 거죠. 아이들은 그래서 구조자라는 말에 경기를 일으킵니다. 아이들 스스로 손에 손잡고 나온 것이지 구조를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생존 학생들이 배에서 나와 해경에게 처음 들은 말은 ‘어, 나왔네?’였다. 아이들에게 이 말을 들은 박 씨는 해경이 구조할 의지조차 없었던 것이라고 해석했다. 살아나왔다는 안도도 잠시, 생존 학생들은 살아야겠다는 생존본능 때문에 친구들을 두고 뱃속에서 나왔다는 죄책감에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 고(故) 신호성 군 어머니와의 대담회. 그녀는 지난 2일 광화문 삭발식에 참여했다. 단원고 실종•희생 학생 부모님의 목에는 하나같이 아이들의 학생증이 걸려있었다. 이영건 사진기자

“살아 있는 내 새끼들에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줘야겠어요…”
단원고에서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정부 합동분향소로 걸어갔다. 원래 일정은 분향소에 들어가 헌화하는 것이었지만, 그날 분향소엔 영정사진이 없어 헌화를 하지 못했다. 실종자들과 희생자들의 영정사진은 4월 4일 아침, 거리로 나간 가족들의 품에 안겨있었다.
 가족들은 바다에 잠겨있는 세월호 인양 촉구와 정부가 발표한 특별법 시행령(안)의 폐기를 요구하며, 안산에서부터 광화문까지 이틀 동안 걸었다. 가족들과 시민들은 세월호의 조속한 인양과 진상규명 촉구를 외치며, 안산부터 진도 팽목항까지 지난 1월, 20일 동안 450km를 걸은 적도 있다. 그들은 그 후 세월호 참사 1주기가 다가오는 지금도 똑같은 이유로 40km를 걸었다.
 김 사무국장은 지난 1년의 세월을 ‘유가족들이 엄마, 아빠로서 자격을 묻는, 본인을 학대하는 시간’이었다고 이야기한다. 그가 1년 동안 본 실종자•희생자 가족들은 ▲급속한 노화 ▲기억력 이상 ▲시력 감퇴 ▲잇몸 질환 ▲화병으로 인한 호흡기, 피부 질환을 앓아 정신적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많은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분향소 옆 컨테이너에서 2학년 6반 고(故) 신호성 군의 어머니를 만났다. 지난달, 그녀는 희생자 유가족의 육성기록집 <금요일엔 돌아오렴> 북콘서트에서 발이 골절돼 도보행진에 참여하지 못하고 남았다. 2013년에 세월호를 타봤다고도 했다. 그녀는 아들이 죽어갔던 장면을 떠올릴 수 있어 더 고통스러워했다.
 그녀의 아들, 호성 군은 어른이 잘못해도 잘잘못을 따지는 똑 부러지던 아이였다. 하지만 그녀는 호성 군이 미움 받을까 봐 “덮어두자, 그러다가 너 미움 받아”라며 부당해도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그렇게 키운 아이가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방송을 듣고 죽음을 가만히 기다렸으니, 더욱 그녀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죄책감이 들어서 나서지 말라고 했던 그런 엄마가 전국을 돌아다녔어요. 죽어서 호성이를 보면, ‘엄마가 그래서 자식 죽었어. 근데 엄마는 또 가만히 있다가 왔네?’ 이럴까 봐 가만히 있을 수 없어요. 살아 있는 (대한민국 모든) 내 새끼들에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줘야겠어요. ‘엄마가 이렇게라도 하고 왔으니 용서해 주겠니…?’”

원래 일정이라면 희생∙실종 학생 103명의 유해가 묻혀 있는 ‘하늘공원’도 다녀간다. 416기억저장소와 참여자들은 뜻을 모아, 다른 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안산-광화문 도보행진 대열에 서둘러 합류했다. 다른 날에 간다면 하늘공원에서 아이들을 만나볼 수 있다. 아직 뭍으로 올라오지 못한, 가족 품에 돌아오지 못한 9명의 실종자가 있다. 실종자 가족들도 살아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못한다. 다만 얼굴도 시신도 알아보지 못할지라도 그 뼛조각만이라도 만져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한다. 아직 세월호에 ‘사람’이 있다.


   
▲ 합동분향소. 상복을 입은 실종자•희생자 가족들이 304개의 영정사진 앞에서 묵념 중이다. 이영건 사진기자

 

<416기억저장소, 기억과 약속의 길>
*장소: 416기억저장소(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
*참가비: 무료
*신청방법: 10명 이상이 모이면 평일•주말 모두 가능.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
*일정: 5시간 30분가량. 416기억저장소 > 단원고 > 분향소(유가족과 대담) > 하늘공원(선택) > 4시에 팽목항으로 가는 무료 셔틀버스도 탈 수 있음(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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