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이란 무엇이냐?” “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이냐?” 등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쉽지 않은 듯하다. 이 질문에 대하여 실제로 별의별 대답들이 “내 대답도 정답!” 하며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기독교의 구원은 무엇인가? 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계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 더 정확한 길은 없다. 기독교의 구원은 무엇인가? 누가 참 그리스도인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대답은 “인자(예수 자신)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라는 말씀이다(요 6:53). 예수님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신다? 이 ‘끔찍한’ 말씀을 들은 사람들 다수가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60)”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결국 예수님을 떠났다고 한다(66).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려고 왔다가 ‘힘든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벽’에 부딪혔다. 그 ‘벽’은 ‘자신의 생각’이라는 선입적 무장(武裝)을 포기하고 버려야만 넘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기 보다는 예수를 떠나는 쪽을 택했다.
 기독교적 구원의 참 본질은 무엇인가? 참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어느 ‘똑똑한’ 이론가가 어떤 ‘기발한’ 대답을 제시하든 간에 그가 실제로 예수의 살을 ‘먹고’ 예수의 피를 ‘마시는’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그는 예수의 말씀에 의하면 아직 ‘속에 생명이’ 없는 자다. 교회 안에서 어떤 교리적, 신학적, 교회제도적, ‘체험적’ 근거로 자신의 구원에 대해 자신(自信)하고 있던지 간에, 그의 중심에 예수의 살을 ‘먹고’ 예수의 피를 ‘마시는’ 일은 없다면, 그는 아직 ‘생명’과는 상관이 없는 자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먹음’과 ‘마심’으로 말씀하신 것에는 중대한 의미가 있다.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일은 빵과 포도주가 나의 존재 속 중심에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분해된 ‘빵’과 ‘포도주’가 나의 뼈와 조직을 형성하도록 하는 것이다. 분해된 ‘빵’과 ‘포도주’가 내 생명의 참 동력(에너지)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참 본질은 ‘고난으로 찢어진 예수의 살’이 내 존재 중심에 들어와 오직 그 ‘살’로 ‘새사람(엡 4:24, 새로운 피조물, 고후 5:17)’이 지어지는 것이다. 죽음의 희생인 ‘피’가 ‘새사람’의 존재 중심에서 강물처럼 흐르는(요 7:38) 새 기쁨의 활기와 새 사랑의 동력이 되는 것이다. 알고 보면 ‘십자가’라는 엄청나게 새로운 생명의 원리 밖 다른 어떤 것에서 기독교 구원의 참 본질을 찾을 수는 없다.
어렵다면서 떠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물으셨다(67).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 하고 대답했다(68). 베드로는 옳았다. 아무리 어려워도 아기는 엄마 배속에서 나와야 새 삶을 시작한다. 아무리 어려워도 씨앗은 굳은 겉 껍질을 부수고 나와야 새 차원의 생명인 나무가 된다. ‘자기극대화(원죄)’에 취해서 죽어 있는(엡 2:1) 인간에게 유일하게 살 길이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길 뿐이다. 교회 안에는 빵과 포도주가 그저 지식의 대상인 ‘지식주의자’도 있고, 그저 ‘장식품’인 ‘선데이 크리스천’도 있다. 그들 모두가 기억해야 할 것은 빵과 포도주는 궁극적으로 먹고 마시기 위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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