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1
2013년 5월 봄학기 축제 ‘PLUS’가 열렸습니다. 13학번 새내기들은 축제 전부터 기대감에 부풀어있습니다. 볼거리 없다는 선배들의 말에도 그저 즐거울 뿐입니다. 신문에 실린 사진에서 학생들은 즐거워 보입니다.

장면2
2015년 5월 축제는 열리지 않습니다. 처음 대학에 와서 축제를 경험하고 싶던 15학번 새내기들은 못내 아쉽습니다. 총학생회 구성이 늦어 못 연답니다. 2학기 입대를 앞둔 새내기의 발걸음에는 더욱 아쉬움이 묻어납니다.

여태껏 새내기 여러분들이 새내기로서 당연히 누릴 것들 중 일부는 올해, 누릴 수 없습니다. 학생사회에서 제공하지 못한 탓입니다. 임시 총학생회는 밀려드는 민원만 처리하기에도 벅찹니다. 이런 상황에서 축제는 사칩니다.
지난해, 선배들의 학생사회 참여 부족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잘못 때문에 총학생회는 구성되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상황은 선배들 때문입니다. 새내기 여러분들이 당연히 누릴 것을 누리지 못하는 모든 책임은 선배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니 새내기 여러분들은 선배들 탓을 하십시오. 그래도 괜찮습니다. 처절하게 미워하고 탓을 하십시오.
다만 탓하는 데만 그치지 마십시오. 똑같은 잘못을 여러분들은 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당신들도, 당신들 후배들도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 후배들은 여러분을 탓하지 않게 애써주십시오. 탓을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을 수 있도록 노력해주십시오.
탓 당하지 않는 방법은 의외로 쉽습니다. 관심 갖고 참여하면 됩니다. 그것부터 시작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여태껏 공부만 하느라 학생사회에 참여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는 선배들도 마찬가집니다. 선배들도 공부에만 익숙합니다. 학생사회에서 총학생회의 부재가 익숙지 않습니다. 이때까지 부재한적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선배들은 아직도 학생사회에 참여하는 것이 익숙지 않습니다. 어쩌면 여러분보다 더 익숙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내가 관심 갖든지 그렇지 않든지, 참여하든지, 참여하지 않든지 항상 학생사회는 존재했고 잘 굴러왔으니까요. 학생사회에 눈을 뜨는 것이 익숙지 않아 눈을 감고 있습니다. 이런 선배를 위해 참여해 주십시오.
하지만 학생사회에 관심도 없는데 의무감만으로 참여하진 마십시오. ‘익숙함’을 위해 선택하지 마십시오. 그 익숙지 못함을 견디지 못해, 누군가 나왔다고, 그 누군가가 해야 한다는 익숙함에 이끌린 강요된 선택을 강제로 하진 마십시오. 애 먼 희생정신에 혹해 준비도 안된 누군가에게 ‘그래도’란 이유를 대진 마십시오.
‘그래도’라는 이유는 가볍기 그지없습니다. ‘그래도’라는 이유로 한 선택은 내가 했지만 내 탓이 아니라 남 탓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도’라는 이유에 중(重)한 권한의 학생사회를 걸기엔 위험부담이 너무도 큽니다. 그러니 ‘그래도’를 뒤로한 채 관심 가져 주십시오. 그리고 관심이 의문되고, 의문이 이해될 때까지 노력해 주십시오.
“사랑은 이 악물고 하는 겁니다.” 한 목사님이 설교에서 종종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 악물고 선배를 탓하고, 이 악물고 사랑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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