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두 번째로 리더 ‘노릇’을 하고 있다. 이 때 ‘노릇’은 ‘맡은 바 구실’이다. ‘리더 노릇을 한다’는 것은 리더로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한다는 의미다. ‘리더 노릇을 한다’에 이미 잘 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즉, 리더 노릇은 잘하지 않아도 ‘리더 노릇을 하려면’ 마땅히 잘해야 한다.
리더 ‘노릇’은 불편하다. 시선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잘하든 못하든 시선은 집중된다. 하지만 어떤 경우, 리더 ‘노릇’은 불편하지 않다. 무신경한 경우에 그렇다. 남의 감정이나 이목 따위를 고려하지 않고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으면 리더 노릇을 못한다. 완벽하다.
하지만 리더 노릇을 하기 위해선 시선을 감수해야 한다. 내부든 외부든, 비판이든 비난이든 관계없다. 때론 이 시선을 이겨내야 한다. 외부의 비난은 이겨내고 비판은 받아들여야 한다. 내부의 것도 마찬가지다. 비단 이는 리더 개인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 공동체에게만 적용되지 않고 개인에게도 적용된다. 하지만 리더가 이걸 못하면 그 공동체는 뻔하다. 
흔히들 외부의 비판이 아프다고들 한다. 하지만 내부의 비판보다 아픈건 없다. 내가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비판을 온몸으로 받아낸다는 게 얼마나 아픈지 아는가. 외부의 비판이 그냥 커피면 내부의 비판은 T.O.P랄까? 그래도 이해가 잘 안 되면 가장 가까운 ‘가족’을 예로 들어보자. 비록 부모가 돼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내부 비판을 온 몸으로 받아내는 그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적이 있다.
약 4년 반전, 2010년 10월쯤 육군에 입대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3학기를 마치고(이걸 쓰면 나이가 들통날 테지만 어쩔수 없다) 입대하기 전까지 시간 동안 집에서 하나의 ‘기계’가 된 적이 있다. 날마다 하는 일이라곤 먹고 싸고 자는 일 뿐이었다. 속된 말로 ‘똥싸는 기계’가 된 것이다. ‘책이라도 읽어야지’라고 생각만했고, ‘일이라도 해야지’라고 마음만 먹었다. 인간 노릇도 잘 못한 셈이다. 하지만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매일 별다른 일 없이 충족됐으니 다른 행위를 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귀찮아, 그리고 좀 놀아도 괜찮아’라고 마음먹었다. 보다 못한 엄마가 진지한 대화를 요청했다. ‘시간 많을 때 책이라도 좀 보고, 공부라도 해라.’ 엄마의 요구는 간단했다. 어쩌면 비판이라 아팠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주말이라 집에서 소일거리하며 쉬고 있던 엄마에게 ‘그러면 같이 놀고 있는 엄마나 책 읽고, 공부하라’며 비판(?)했다(사실은 짜증과 화, 그리고 비난에 가까웠다).
군대를 제대한 후에 종종 엄마와 대화한다. 그 종종 대화할 때마다 엄마는 그때 기억을 항상 되살려준다. 아프다. 전해들은 나도 아픈데 그때 당시 엄마는 얼마나 아팠을까. 그때의 비판은 멀쩡한 뼈와 살을 찌르는 칼이었다, 썩은 부위를 도려내는 메스가 아니라.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썩은 부위를 도려내는 메스가 없으면 아픈 공동체다. 아픈 공동체의 리더는 리더 노릇을 잘 못하고 있는 셈이다. 가장 건강한 공동체는 멀쩡한 뼈와 살을 도려내는 칼이 아니라 썩은 부위를 도려내는 메스를 가진 공동체다.
한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위험한 신호는 ‘거의’, ‘스스로 안 묻는다’이다. 그리고 가끔 물어도 ‘괜찮다’고 답하는 것이다. 메스를 들 일이 없는 셈이다. 반면 건강한 공동체는 끊임없이 스스로 묻는다. 괜찮다고 답변하기보다 스스로 부족한 점을 드러낸다. 치부(恥部)를 드러내는 것이다. 보이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부분을 스스럼없이 내보인다. 그럼으로써 메스를 들 구실을 제공하고, 아프지만 도려내기까지 한다. 
공동체의 구성원도 마찬가지다. 공동체의 구성원이 어쩌다 가끔 스스로 ‘나는’ 혹은 ‘공동체’는 괜찮나 묻지 않으면 구성원과 공동체의 노릇은 잘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가. 당신은 한동 구성원으로서, 기독교인으로서, 한국 사회시민으로서 노릇을 잘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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