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망대해와 싸우는 그녀들은 ‘어머니’입니다

▲ 물질을 끝낸 해녀가 육지로 나오고 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하지만, 넘어지지 않고 쉬지도 않고 육지까지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딛는다.
▲ 물질이 끝나고 널어 놓은 잠수복의 모습. 해녀들은 봄/가을, 여름, 겨울에 따라 다른 잠수복을 입는다고 한다.
▲ 이 날, 해녀들이 잡은 ‘앙장구’다. 고슴도치처럼 겉이 가시로 덮여 있는데, 두껍기도 하여 손질하기가 쉽지 않다.

아침 8시, 서둘러 준비하여 물질을 시작한다. 자신을 보호하는 도구는 없다. 오직 맨몸으로 거친 바다와 싸울 뿐이다. 그렇게 바다에 들어가면 4시간 넘게 잠수를 한다. 겨울에 가까운 날씨에 바닷물은 뼈를 에일 듯이 차갑다.

‘해녀’라고 하면 흔히 사람들은 ‘제주 해녀’만을 떠올리곤 한다. 물론 제주 해녀가 가장 유명하고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제주도 다음으로 해녀의 수가 가장 많은 곳이 바로 포항이다. 2013년 기준 포항시청에 등록된 해녀의 수는 약 1,242명이다. 그 수가 큰 폭으로 줄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해녀들이 포항 앞바다에서 활발히 *물질을 하고 있다. 대부분의 해녀들은 한 어촌계에 소속돼 작업을 한다. 기자는 ‘두호동 어촌계’에 소속된 5명의 해녀들을 만나고 왔다. 해녀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소개하고자 한다.
지난 22일 토요일 아침 8시, <두호동 해녀의 집>을 찾았다. 도착한 앞바다에선 해녀들이 이미 물질을 하고 있었다. 방파제에 올라 해녀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바다 위로 아침 햇살이 포근히 비추고, 해수면은 마치 별이 쏟아지듯 반짝반짝 빛났다. 사람들이 붐비는 해수욕장과 떨어져서 그런지 바다는 맑고 투명했고, 바람 따라 불어오는 바다 냄새는 그리 거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바닷바람을 맞은 지 1시간 반, 너무나 추웠다. 단단히 입고 온 외투도 소용이 없었다. 더 이상 바다는 그리 ‘낭만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기자는 이를 어디에도 하소연 할 수 없었다. 기자가 바닷바람을 맞고 있는 시간 동안, 해녀들은 바닷속에서 수없이 잠수를 하며 물질을 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영일만항 개항으로 오염된 바다, 그리고 적조
해녀들은 바다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가 나와 숨을 고르고 다시 들어가는 행동을 무수히 반복했다. 보통 잠수하는 시간은 15초 내외. 해녀마다 그 시간은 각각 다르고, 바다 깊이 있는 것을 채취할 때는 이보다 더 오래 잠수하기도 한다. 이전에는 바닷물이 맑아서 깊숙이 잠수하지 않아도 잡을 만한 것이 보였지만, 영일만항이 개항한 2009년 이후로 바닷물이 많이 오염돼서 요즘은 깊숙이 들어가 찾아야 한다. 63세의 한 해녀는 “이전에는 바다 밑 모래가 하얗고, 바닷물도 맑아 위에서 봐도 해산물이 잘 보였다. 이젠 영일만 일대의 공사로 모래를 퍼다가 바다에 뿌려 물속 바위가 덮였다. 물은 뿌옇게 돼 잘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해녀가 잠수해야 할 시간은 길어지고, 잘 보이지 않으니 위험한 상황에 놓일 가능성은 더 커지는 것이다.
2014년 9월에 있었던 적조현상은 해녀들의 생계에 큰 타격을 입혔다. 적조로 인해 대다수의 전복이 폐사한 것이다. 당시 포항지역 양식어류와 전복 등 27만 여 마리가 집단 폐사했다고 한다. 기자는 해녀들에게 “바다 속에서 전복 발견하시면 ‘와. 심 봤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물어봤더니 해녀들은 활짝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만큼 전복은 해녀에게도 귀한 해산물인데, 적조에 피해를 입어 생산량이 급감한 것이다. 그나마 요즘은 경상도 사투리로 말똥성게를 뜻하는 ‘앙장구’가 제철이다. 앙장구는 일반 성게보다 고급이어서 주로 일식집에 유통되고 일본에까지 수출된다고 한다. 해녀들은 한 번 잠수할 때마다 바위 등 곳곳에 있는 앙장구를 찾아 3~4개정도 집어 물 위로 올라온다. 65세의 한 해녀는 “그렇게 매번 몇 마리씩 가지고 올라올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냥 잠수만 하다 물 위로 올라올 때도 있다”며 “잠수할 때마다 앙장구를 잡아오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목숨 걸고 하는 일이다 보니 매번 조심해야 돼”
이처럼 바닷속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과정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바다 속에는 수많은 위험요소들이 도사리고 있다. 해녀들은 하나같이 물질을 ‘목숨 걸고 하는 일’이라고 했다. 이날도 한 해녀가 방파제에 머리를 여러 번 부딪혀 크게 다칠 뻔했다. 방파제 밑 바위에 있는 앙장구를 캐고 있었는데, 파도가 치면서 몸을 가눌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바위와 방파제에 부딪혀 크게 다치는 경우가 많고, 바위나 그물, 배 밑에 걸려 사고가 일어나는 경우도 다반사라고 한다. 해녀들은 “다른 어촌계의 해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일 년에 몇 번씩 듣는다. 내 시누이도 해녀인데, 지금 사고로 머리를 다쳐 입원 중이다”라며 “목숨 걸고 하는 일이다 보니 매번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30년 넘는 경력을 가진 베테랑일지라도 바다에 나갈 때마다 매번 긴장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강조했다.
낮 12시가 넘어서야 해녀들이 하나 둘 땅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바다 근처라도 주울 만한 것들이 있는지 찬찬히 살펴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등에는 오늘 하루 잡은 성게며, 해삼, 문어 등을 담은 망태기를 짊어진 채였다. 4시간이 넘게 바다와 싸운 가냘픈 몸에 망태기까지 짊어져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했지만, 그녀들은 꿋꿋이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뭍에 올라와서 망태기를 땅에 내려 놓고 나서야 몸에 매단 납 벨트를 끌렀다. 해녀들은 그렇게 맨몸으로 망망대해와 싸우고 온 것이다.

수 백 번 이어지는 잠수, 생명을 위한 움직임
심지어 겨울을 향해 가는 가을 바다의 수온은 너무도 낮았다. 기자가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바닷물에 발을 담가보았는데, 뼈를 에는 듯한 고통이 밀려올 정도로 차가웠다. 그녀들은 그렇게 고통스러울 정도로 낮은 수온의 바다에서 추위를 견디며 일한 것이다. 해녀들은 “아마 가만히 있으면 20분도 채 안 돼 동사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바다에서 아래까지 잠수하고 올라오고를 반복하기 때문에 몇 시간이고 버틸 수 있다”고 말했다. 무수히 반복하는 잠수가 굉장히 힘들어 보였는데, 오히려 그녀들의 생명을 위한 움직임이었다.
<해녀의 집>으로 와서 잡은 해산물들을 정리한 후, 해녀들은 한 명씩 돌아가면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다른 해녀가 샤워를 하고 있는 동안, 나머지 해녀들은 앙장구 손질에 들어갔다. 물질을 끝내고 조금 쉴 법도 한데, 해녀들은 “이걸 다 누가 까노. 지금부터 시작해도 밤까지 까야 한다”며 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앙장구에 칼집을 내 잘라 안에 있는 살을 발라내는 작업이다. 섞인 내장을 발라내서 깨끗이 손질하는 것으로 작업이 끝나는데, 보통 6시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몸을 데우지 못하고 작업을 하는 해녀들은 숭늉이며 따뜻하게 찐 고구마, 귤을 먹으며 몸을 녹였다. 파도가 2m를 넘으면 물질을 하지 못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 작업이 한 겨울에도 이어진다. 63세의 한 해녀는 “나이가 많지 않았을 땐, 5일이고 10일이고 계속 작업을 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며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지침(기침)이 나면 잘 낫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무리 억척스럽다고 할 지라도 60대가 넘고, 70대에 이르는 해녀들이 이 고된 노동을 감당하기에 버거운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기자가 찾아갔을 때, 대부분의 해녀들이 감기로 고생하고 있었다.

포항시 해녀 보호 및 육성 지원에 나서
포항시 해녀 전체 95% 이상이 50~60대다. 앞서 이야기했듯, 2013년 기준 포항시에 등록된 해녀의 수는 1,242명인데 이는 2005년의 절반 수준이다. 고령화되고, 그 수가 줄고 있는 해녀들을 보호하고 지원하기 위해, 경상북도에선 올해 2월부터 잠수어업인(해녀, 잠수부)에 대한 진료 범위를 확대했다. 포항시만 하더라도 선린병원, 포항의료원을 비롯한 5개의 병원, 3개의 한의원, 5개의 약국에서 진료 시 본인 부담금을 지원해 준다. 해당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약국에서 약을 조제 받을 때 잠수어업인증을 제시하면 본인부담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이는 잠수병에 한한 것이며, 60, 70대 노인들에겐 쉽지 않은 절차다. 63세의 한 해녀는 “예전보단 지원이 나아졌지만 거의 없다고 할 수 있고, 절차가 복잡하고 귀찮아 그냥 돈을 내곤 한다”라고 말했다.
한편, 포항시는 시 차원에서 올해 초 ‘나잠어업(해녀들이 잠수해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것) 보호 및 육성 조례안’을 의결하여 적극적인 해녀 보호에 나섰다. 이 조례는 열악한 작업환경과 고된 조업여건 속에서도 전통어업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나잠어업 종사자의 근본적인 보호대책과 삶의 질 향상을 목적으로 함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나잠어업 보호 및 육성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은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어머니’의 이름으로
해녀들이 힘든 작업 현실 속에서도 평균 30년 이상 이 일을 계속 해올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의 어머니이기 때문일 것이다. 앙장구 작업을 하면서 해녀들은 가족들 얘기로 꽃을 피웠다. 기자도 손녀 대하듯이 먹을 것도 이것저것 챙겨주고, 점심 때가 되어 밥 먹고 가라며 자신들의 밥상에 초대해줬다. 63세의 한 해녀는 해녀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에 “이 일은 우리 세대로 끝날 것이여. 그렇다고 우리 아이들한테 이 힘든 일을 하라고 하고 싶지 않아”라고 했다. 자신들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지금껏 힘들어도 이 일을 억척스럽게 해왔지만, 자식들은 이 위험하고 고된 일을 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인 것이다. 그래도 ‘가족들은 이 일을 그만하라고 하지 않냐’는 질문에 해녀들은 “자식들은 하지 말라고 하지만 오히려 매일 하던 일을 하지 않으면 병 생긴다”라며 “이 일을 평생 해와서 천직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70살이 되든, 80살이 되든, 아프지 않을 때까지 이 일을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갈 때쯤, 앙장구 작업도 마무리가 됐다. 해녀의 하루가 그렇게 저물어갔다.

*물질: 주로 해녀들이 바닷속에 들어가서 해산물을 따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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