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1944>에서 김희준(경영경제 98) 씨와 수다 한 판

▲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과 다부진 입매가 인상적인 김희준 씨

 갑자기 손님 여러 명이 들이닥쳤다. 조용하고 차분하던 카페가 소란스러워진다. 윙 돌아가는 커피 기계 소리, 손님들이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로 카페 분위기가 들뜬다. 직원과 사장은 커피 만들랴, 서빙하랴 정신이 없다. 이 와중에 사장은 고양이 인형 탈을 쓰고 서빙을 한다. 탈을 쓰면 잘 보이지도 않는 데다가 음료가 유리잔에 담겨있다 보니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럽다. 탈을 한 번 썼다가 벗으면 머리가 헝클어지고,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그래도 손님들이 재미있어하고 좋아하니, 조금 피곤하고 힘든 건 한숨으로 넘겨버린다. 포항 육거리 골목에 위치한 <카페 1944> 김희준(경영경제 98) 사장의 이야기다. 고양이 카페로도 유명해서 많은 한동인들이 거쳐 간 이곳 <카페 1944>에서 평일 한적한 오후, 사장님과 수다 한 판 떨고 왔다.

“고양이 별로 안 좋아해요, 개 키워요”
<카페 1944>에 들어서면서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벽에 걸려있는 그림이 눈에 띈다. 이 모든 것이 김희준 씨의 손에 의한 것이다. 잠시 인테리어 일을 한 적이 있는 그와 디자인학부 출신인 동생이 카페를 함께 꾸몄다고 한다. <카페 1944>가 고양이 두 마리가 사는 ‘고양이 카페’가 된 데도 이유가 있다. “고양이를 키울 생각도 없었어요. 그리고 전 고양이도 별로 안 좋아해요. 개 키워요. 그런데 왜 고양이가 됐냐 하면, 입구 시멘트 바닥을 보면 고양이 발자국이 찍혀 있어요. 어떻게 보면 고양이가 첫 손님이잖아요. 그리고 동생이 스위스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는데, 동생 블로그 아이디가 ‘집 나간 고양이’였어요. 그래서 카페 이름을 ‘집 나간 고양이’로 할까도 생각했었어요.” 그러다 카페 이름이 <카페 1944>로 된 건, 원래 있었던 폐가를 개조하면서다. 한옥이었는데, 나무에 ‘1944년 몇 월 몇 일에 세워졌다’고 새겨져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지어진 집이었던 것이다. 김 씨는 ‘집 나간 고양이’와 ‘1944’를 두고 고민하다 마크 디자인이 쉽다는 동생의 추천으로 <카페 1944>로 정했다.
한편, 폐가가 카페로 개조되기 전, 이 골목은 포항에서 유명한 우범지역이었다고 한다. “50, 60대 분은 이 골목을 ‘삥 뜯는 곳’으로 알았어요. 여기는 큰길에서 빠진 골목길이잖아요, 예전에는 이 골목길에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옆 가게인) ‘고봉민 김밥’도 무너진 벽이었고, 우리 집은 폐가, 옆에는 술집, 이 앞은 애들이 담배 피우는 곳이었죠. 공사할 때 지갑 5개 주웠어요. 애들이 도둑질 하고 버린 지갑이죠.” 4년전, 이렇게 <카페 1944>가 육거리 골목에 생기게 됐다.

집에서 가까워 온 한동대, 13학기까지 다녀
<카페 1944>가 김희준 씨의 첫 사업이었던 것은 아니다. <카페 1944>를 열기 전, 16년 동안 하던 학원 사업을 했다. 김 씨의 이야기는 16년 전으로 올라간다. 제대 후 복학하기까지 시간이 남아 학원을 열었다. 재미도 있고, 학원도 잘 되는데 학교를 다니기 힘들었다. 포항 토박이인 김 씨가 학원을 낸 곳은 포항이었지만, 이 때 다니던 학교는 서울에 있는 경희대였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편입을 하기로 결정했다. 포항에서 편입할 수 있는 곳 중에 찾은 곳이 집에서 가까운 한동대였다. 그래서 원래는 94학번인데, 한동대에 편입해서 98학번이 됐다. 학원 사업에 관심이 많고 대학교는 ‘타이틀’ 정도로 생각하던 그는 최소한의 학교 생활을 했다. 낮에는 수업을 듣고, 저녁에는 학원에서 일했다. 집도 가까워서 기숙사에서 한 번도 생활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13학기를 다녔다. 김씨는 9학기부터는 학점당 돈을 내어 3학점, 6학점 정도 들었다고 말했다.
학교를 오래 다녔지만, 김 씨는 가장 당연하고 평범한 것을 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밤에 수업 끝나면 무조건 집에 갔어요. 일을 해야 됐기 때문이죠. 13학기 때 팀장 하기 전에는 MT도 안 갔어요. 학원 때문에 25인승 버스가 있어, 학생들을 MT장소까지 데려다 주기만 했거든요. 나중엔 저도 MT도 가고 싶고 놀고 싶더라고요. 맨날 학원에 가야 하니까. 또 하나는 저도 밤을 새보고 싶더라고요. 기숙사도 살아보고 싶고요. 한동대에선 당연한 거를 못해보니까 그런 게 부럽고 해보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김 씨는 팀장이었던 마지막 13학기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팀 MT를 간 것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했다. 팀장은 보통 2, 3학년이 하는데, 선배들이 팀 활동에 참여를 안 한다는 것을 파악한 저학번들이 2학기 때 김 씨를 추천했다고 한다. 그 때 김 씨는 이미 30대였다. 나이도 많고 학기수도 제일 많은 선배가 팀장이 되었으니, 팀 전원이 MT에 참석했다. 김 씨는 팀원을 모두를 자신의 차에 태워 경주로 향했다. 그렇게 쌓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김 씨에게 지금까지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4년간 이 자리를 지키다 보니 선, 후배 졸업생들이 찾아오곤 하는 것이다. “한동에서 사람들로부터 배운 게 가장 컸던 것 같아요. 같은 팀이었던 후배들과 지금까지 연락하면서 지내기도 하고요. 육거리에서 카페를 하다 보니까 한동대 학생들하고 계속 관계를 이어가요. 가끔씩 포항 오면 찾아오는 졸업생들도 있고요.”

공연, 전시, 경매…문화사업의 시작
선배가 운영한다고 하면 ‘HGU Shop’이나 동아리 지원금 제의가 많이 들어올 것 같았다. 그의 대답은 ‘Yes.’ 하지만 그 나름대로 고충이 있다. “후배가 오면 잘 챙겨주곤 했는데, 이것도 매년 하다 보니까 힘들어서. 제가 부자가 아니에요. 홍보 효과 별로 없는 건 뻔히 알지만 총학생회도 도와주고 싶고, 동아리도 도와주고 싶죠. 그렇다고 누군 해주고, 누군 안 해주고 하기가 참 애매하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도와줄 방법을 찾은 것이 카페에서 공연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공연을 해주면 지원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래서 걸스 아카펠라, 피치파이프 등 수많은 공연 팀들이 이곳에서 공연을 했다.
초기엔 한동대 학생들 위주로 공연이 열렸다면, 이제는 주로 포항 시민들이 공연한다. 학생들을 도와주기 위해 시작한 것이 발전해서 김 씨의 ‘문화 사업’으로 이어진 것이다. “포항시 작가들과 함께 골목길 작품전도 하고, 여기서 그림 판매, 경매도 했었고, 작가 모시고 책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포항 공연 팀들 와서 하고, 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하고 있어요.” 어쩌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보통, 공연을 하면 커피 기계 소리가 공연에 방해돼 손님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문화사업을 계속해서 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내가 즐거워서, 내가 재미있어서”라고 말했다. “보통 뒤풀이는 근처 맥주집에서 하는데, 지난 번엔 우리끼리 여기서 뒷풀이를 했어요. 같이 공연 기획하고, 뒤풀이하고. 그게 사는 맛 같더라고요. 솔직히 하고 싶다는 사람 거절하기도 그렇고요. 실패했던 적도 있어요. 시켜 놨더니 진짜 못하고(웃음).”
김 씨는 이외에도 다른 카페가 시도하지 않은 특이한 이벤트를 많이 한다. 앞서 말한 고양이 탈도 그 중 하나다. 김 씨는 전 세계 어느 카페에 가도 사장님이 탈을 쓰고 서빙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또한, 지금은 뜸하지만, 손님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가 고 박을용 교수님 팀이었을 때 했던 ‘모르는 사람과 하이파이브하며 인사하는 미션’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지금은 고양이 카페, 좌식 좌석이 있는 카페가 주변에 많지만, 이것도 그가 처음 시도한 것이다. 라떼 위에 글씨를 쓰기도 한다. 보통 고양이 그림을 그려주는데, 장난으로 커플이 오면 ‘깨져라’고 쓰고, 남자들끼리 둘이 오면 ‘우리 사귀어 볼까?’라고 쓰기도 한다고 했다. 기자에겐 준 라떼엔 ‘기사 잘 써라’라고 협박 아닌 협박 문구를 써줬다.

꿈돌이 사장님
김 씨는 경영학도이고 사업을 운영하고 있어서 그런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했다. 돈을 벌어야 하는 문제이기에 수익을 따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정말 이것 저것 꿈이 참 많았다. 현실과 이상 사이. 돈은 되지 않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지만 하고 싶은 일이 너무도 많다고 했다. 그 중 하나가, 양덕에 ‘한동대 작업실’을 여는 것이다. 카페인데 밤 늦게까지 하는 도서관 같은 곳이다. 학생들이 편하게 와서 늦게까지 공부하고 작업하는 공간을 마련해 주고 싶다고 했다. “한동대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다 좋다고 해요. 문제는 수익이 나지 않는 거에요. 돈이 많으면 해주고 싶은데, 생각해 보세요. 수익이 나올 것 같아요? 5,000원 내고 하루 종일 있는 거에요. 그런 손님이 20명, 30명 되어서 북적북적 해도 돈은 안 되는 거죠. 근데 해보고는 싶어요. 우리끼리 놀기에는 재미있을 것 같아요.” 두 번째 꿈은 서점을 만드는 것이다. 책을 좋아하는 김 씨는 소설을 써 보고 싶다고도 했다. “서점도 돈을 번다는 생각을 하진 않아요. 지금보다 장사가 안되고, 내가 진짜 안 되겠다 싶으면 1차적으로 여기를 서점으로 만들고 싶어요. 방 안과 2층을 책으로 다 두르고 싶은데, 어떻게 장사를 해야 될지 고민하고 있어요. 멀리 봐서는 바닷가 보이는 데서 건물을 하나 지어서 서점을 만들고 싶어요. 망하려고 하는 거죠(웃음). 그래도 오는 사람은 되게 좋을 것 같지 않아요?”

마지막으로, 김 씨는 열심히 살기 보다는 재미있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내 힘이 안 되는 것을 억지로 이루려고 하기 보단, 능력이 안 된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저는 오히려 놓고 받아들이니까 행복하더라고요. 또, 인생을 재미있게 사려고 하고. 그러다 보니까 인생이 재미있어지더라고요. 이것을 어떻게 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다는 ‘내가 무엇을 해야 기분이 좋아질까’에 관심을 두기 때문이에요. 제 기준에 성공은 자신이 행복한 거에요. 그래서 나보고 누가 선배님 성공하셨어요? 물어보면 성공했다고 말할 거에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 일이, 제 인생이 재미있어지니까요.”

정리 이해진 기자 leehj@hgupress.com

저작권자 © 한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