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사에 관한 기사를 쓰기 전 일이다. 쌀쌀한 가을 날씨를 신문사의 열린 문틈으로 슬며시 맛보며 시간을 죽이던 나에게 토치에 바싹 구워진 울릉도 오징어가 들려졌다. 신문사에 새로 들어온 기자가 고기 구울 때나 쓰는 토치로 열심히 익힌 것이다. 질겼다.
오징어를 맛보라고 주는 사람도 있고, 같이 오징어를 열심히 뜯고 있는 사람들이 곁에 있으니 나는 고독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임을 지적하며 “고독을 사랑하는 자는 야수가 아니면 신이다”라는 금언을 남긴 바 있다. 고독은 인간이 견디기 힘든 것이지만 놀랍게도 대한민국에는 만성적 고독에 놓여있을지도 모르는 인구가 2010년 기준으로 414만 2천 가구나 된다. 일생을 홀로 보낸 니체나 칸트가 대단한 철학 이론을 내놓는데 고독이 산파 역할을 했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보태면, 대한민국은 인문학 강국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사회는 여기저기 곪아 문드러졌고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1위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노르웨이의 숲>의 미도리는 쾌활하지만, 고독에 둘러싸여 있는 존재다. 쾌활한 미도리도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죽은 것인지 산 것인지 모르는 상태로 주변 사람들도 자신을 산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으로 바라보는 상황이었다. 누구나 죽는다. 미도리처럼 죽음을 직면하는 순간, 떠오르는 질문은 어떻게 죽느냐일 것이다. 고독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는 것은 슬프다. 그동안 죽은 것처럼 살았다면, 죽음의 순간에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은 비극이다. 그래서 고독사는 슬픈 죽음일 것이다. 고시생이 고시공부를 하다 홀로 죽었다든지 배수관으로 썩은 냄새가 올라와 아래층에 확인했더니 죽은 60대 남자가 있다는 소식을 뉴스로 접했을 때 혀를 끌끌 차는 것은 슬픔에 대한 공감일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가 모두 만성적인 고독에 빠져 헤어나오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조심스레 단정 지어 본다. 이 사회는 고독을 권한다. 고독에서 나오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들에게 나약함을 탓하고 사회는 온전히 책임과 의무의 자리에서 이탈한다. 다들 너무 고독해서 SNS에 자신의 사진을 올리면서 소통의 허기를 채우고, 5시간마다 고독사가 일어나지만 우리는 혀를 끌끌 차고 자신은 아직 괜찮다고 안도한다. 이제 군중 속에서 고독한 당신이 있다. 만성적인 고독에 잠겨 스스로 고독할 자유를 잊은 당신에게 대한민국은 고독 공화국이다.
만성적인 고독에서 빠져나올 때다. 기사를 쓰면서 다시금 아리스토텔레스의 탁월한 통찰력에 혀를 내둘렀다. 인간은 홀로 살지 못한다. 기댈 곳은 우리 자신 스스로와 고독한 칸트가 말했듯 목적으로서 인간이다. 인간관계는 질겨야 한다. 울릉도 오징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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