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문화전> 간송 전형필의 얼을 느끼다
 
일본이 한반도를 집어삼킨 일제 강점기. ‘문화보국’이라는 신념 하에, 위기에 처한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들을 사비로 사들인 한 남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간송 전형필 선생(이하 간송)이다. 조선에서 손에 꼽는 부잣집에서 태어난 간송은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하지만 10대 시절 간송은 할아버지, 작은할머니, 작은할아버지, 친할머니, 작은아버지가 비슷한 시기에 연달아 타계하고, 유일한 친형이 28세의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하는 비극을 겪는다. 인생의 유한함을 깨달은 까닭에, 간송은 이후 많은 재산을 개인적으로 호의호식하는 데 쓰지 않고, 대사를 추구하는 데 쓰게 됐다고 전해진다. 일제 강점기와 더불어 6·25 전쟁에 이르기까지 목숨이 위태로운 와중에도, 간송이 온 재산과 삶을 바쳐 지킨 문화재들은 간송 미술관에서 현재까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서울 동대문디지털플라자(DDP)에서 열리고 있는 <간송문화전>은 문화재들이 어떻게 그의 손을 거쳐 지금까지 보전되고 있는지 말해준다.
 
고려비색 천하제일(高麗翡色 天下第一)
당당하게 벌어진 어깨, 그러면서도 아름답게 휘어진 허리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낸다. 면 전체를 균형 있게 채우고 있는 69마리의 학은 하늘로 날아갈 것만 같다. 정제된 유색은 우아함과 고풍스러움을 더한다. 국보 제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간송은 1935년 일본인 거상으로부터2 만원을 들여 이 청자를 샀다. 좋은 기와집 한 채가 1,000원이던 시기임을 고려하면, 2 만원이 얼마나 큰 돈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는 간송이 돈보다도 우리 문화재의 가치를 우선시했음을 잘 보여준다.
불쏘시개가 될뻔한 겸재 정선의 명화                      
장형수라는 *거간은 지방의 양반집을 찾아다니며 서화나 골동을 사서 되파는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일파 손병준의 집에서 머물다가 머슴이 범상치 않아 보이는 종이로 불을 때는 것을 목격한다. 그것이 보통의 화첩이 아님을 확인한 그는 손병준으로부터 즉시 사들였고, 간송이 문화재 수집창고로 활용하던 서울의 ‘한남서림’으로 가지고 왔다. 불쏘시개로 될 뻔한 아슬아슬한 순간을 넘긴 이 화첩이 바로 겸재 정선의 <해악전신첩>이다. 겸재가 72세에 남긴 마지막 작품집으로, 21점의 그림과 시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금강내산>은 72세 겸재의 붓끝에서 나오는 원숙하면서도 세밀한 표현이 압권이다. <해악전신첩>은 다행히 불쏘시개가 될 운명을 면했지만, 이 시기 수많은 우리 문화재가 얼마나 함부로 다뤄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은밀하게 위대하게 <혜원전신첩>                                                                             
‘은밀’하지만 ‘위대한’ 신윤복의 그림은 18세기 조선 시대의 모습을 솔직 담백하게 보여준다. 특히, ‘조선 시대 기생들의 단오 맞이 워크숍’이라는 미술관 안내원의 표현이 잘 어울리는 <단오풍정>은 목욕하는 여인들의 적나라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색감의 사용과 균형 잡힌 화면구성으로 거부감 없이 작품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조선의 천재 화가로 알려진 신윤복이지만, 그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존재하지 않아 상상 속의 이야기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신윤복의 대표작인 <미인도>를 접한 후, 신윤복에 대한 관심을 두게 된 간송은 일본의 골동품상인 야마나카 상회 오사카 지점에서 신윤복의 <혜원전신첩>을 수장(收藏)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다. 일본인 수장가와의 몇 번에 걸친 협상 끝에 양도에 성공한다. 이를 계기로, 신윤복의 그림과 그의 생애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
전시의 화룡점정 <훈민정음 해례본>
1930년대, 일본은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뿌리째 뽑아버리기 위한 민족말살정책을 감행한다. 일본에 <훈민정음 해례본>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일본의 눈에 해례본이 발견되면 그 존재는 물론, 보관하고 있는 사람의 안위도 보장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간송은 해례본이 한 가문의 가보로 내려온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 진위를 파악한 간송은 대가로 1,000원을 주고, 안동에서 해례본을 손에 넣는다. 아들에게도 말하지 않고 철저히 비밀로 한 간송은 해방 후 해례본의 존재를 세상에 널리 알린다. 이로써 한글의 창제 원리와 과학성, 창제 당시 역사적 상황 등이 밝혀질 수 있었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도 잠시, 우리나라는 한국전쟁의 비극을 맞이한다. 간송은 피난 중 몸에 품고 다니고, 잘 때는 베개 밑에 넣고 자는 등 해례본을 목숨 걸고 지켰다고 전해진다.
 
간송이 온 마음을 다해 지킨 문화재들로부터 민족의 비극이 묻어 나오는 듯했다. 그래서인지관람객들이 문화재 하나하나를 따뜻한 눈길로 지켜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가히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작품들 각각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도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했다.간송 미술관 개관 76년 만에 첫 외부 전시인 <간송문화전>에서 아름다움의 절정에 있는 우리 문화재들을 직접 보고, 그 속에서 간송의 얼을 느껴보는 것이 어떨까?
*거간: 사고파는 사람 사이에 들어 흥정을 붙임, 혹은 그런 사람
이해진 기자 leehj@hgu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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