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 한동신문사의 사시(社是)입니다. 신문사는 하나님의 대학에서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신문에 옮겨내야만 합니다. 정말 죽을 맛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대학이란 이름도 감당하기 힘든데,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요구하니 말입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부담스러운 문구를 사시로 정했는지 선배들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신문사에 들어온 이상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해봐야죠.
한 번 가정해봅시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신이 존재하며 그가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고요. 그가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가족과 저녁식사를 하며 즐거웠던 황금연휴의 추억을 나누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반면 차디찬 물 속에서 자식을 잃은 슬픔에 가슴을 부여잡으며 눈물을 삼키는 부모도 있을 테고요. 제가 신이라면 전자보다는 후자에 더 눈길이 갈 것 같습니다. 이는 후자가 전자보다 더 불쌍하니까 라는 식의 감정적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후자가 전자보다 신을 더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신이라면, 뜻밖의 고통으로 무너져 내린 자들에게 먼저 손 내밀지 않을까, 가늠할 수 없는 그들의 슬픔을 옆에서 가만히 가늠하려 노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동신문사도 감히 그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나름대로 이해한 사시에 따라, 가장 소외 받는 자의 곁에, 누구에게도 조망 받지 못하는 자의 곁에, 곁을 두지 못한 자들의 곁에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자의 목소리를 듣고 이를 함께 내어줄 수 있는 신문이 되겠습니다. 더불어 그들을 밀쳐낸 사회와 그 구조의 무자비함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겠습니다. 이는 비단 한동신문사 뿐만이 아닌 다른 모든 언론의 책무일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언론의 모습은 때론 편향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세상의 논리와 이야기, 그리고 사람들을 거칠게 주류와 비주류로 나눠봤을 때, 후자에 집중하겠다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일부로라도 편향적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세상이란 양팔저울이 이미 기울어져 있으니 말입니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하늘 높이 치켜 올라간 저울의 끝에 작은 목소리 하나라도 보태야 하지 않을까요? , 이 모든 작업과 방향설정은 항상 진실을 찾고자 하는 조심스러운 몸짓을 바탕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실은 세상을 주류와 비주류로 나누는 등의 거친 분류로는 걸러질 수 없는 예민한 녀석이기 때문입니다.
‘강자의 개가 되지 말고 기자의 자부심을 가져라.’ 200호를 맞이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발췌한 한 새내기의 일갈입니다. 알겠습니다. 강자의 논리만을 재생산 하거나 이에 휩쓸리지 말고, 진실을 찾는 기자의 역할에 충실해 자부심을 찾으라는 말로 이해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따끔한 충고를 건네주는 독자가 있기에 200호까지 신문을 낼 수 있었습니다. 어느새 200호 입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한동신문사가 되겠습니다.
전광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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