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도에 포탄이 떨어진 지 한 달이 채 안 된 어느 겨울날, 난 전역했다. 감옥에서 출소한 듯한 해방감과 전방에서 굴렀다는 자신감이 가슴을 부풀렸다. 못할 일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돈이 없었다. 돈이 필요했다. 괜찮다 싶은 알바는 겨울방학을 맞은 대학생들이 이미 차지하고 있었다. 알바천국을 뒤져보니 야간 택배 상하차 알바가 있었다. 네이버에 검색해보니 이 알바에 대한 의견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지더라. 욕과 만류하는 목소리로. 하지만 알 수 없는 자신감에 휘말린 난 별걱정 없이 지원했다.
결론부터 말하겠다. 일주일도 못 버텼다. 7톤짜리 견인포를 방열하고 43kg짜리 포탄을 옮겨댔던 포병이기에 자신 있었지만 상하차는 인간이 할 일이 아니다 싶었다. 시급 7,000원은 왕복 세 시간에 달하는 이동시간을 포함하니 최저임금과 별다르지 않았다. 컨테이너를 가득 채운 전자제품과 아령, 빨간 국물이 흘러나오는 김치 상자를 30분 단위로 비워내며 느낄 수 있었다. 아, 이렇게 밤새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어 하루 이틀 만에 택배를 받을 수 있었구나. 택배 기사한테 잘해야겠다.
이쯤에서 조지 오웰을 불러보겠다. 그는 사회 밑바닥에 있는 탄광 노동자 사회에서 경험한 일을 르포르타주로 써냈다. ‘위건부두로 가는 길’이다. 끊임없이 석탄을 채굴하는 탄광 노동자를 본 그는 책에서 말했다. 내가 느낀 것과 비슷해 보인다. “꽃에 뿌리가 필요하듯, 위의 볕 좋은 세상이 있으려면 그 아래 램프 빛 희미한 세상이 필요한 것이다…우리 모두가 지금 누리고 있는 비교적 고상한 생활은 ‘실로’ 땅 속에서 미천한 고역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빚지고 얻은 것이다.”(위건부두로 가는 길. 48~50쪽)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이들이 한동대에도 있다. 청소 근로자다. 그들의 중요성은 그들이 없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일요일 저녁, 오석관에 있어본 학생은 알 것이다. 정수기 옆 물통에는 탁한 색의 검은 액체가 넘실거리며 변기 옆 휴지통의 휴지는 고봉밥 마냥 수북이 쌓여있다. 생활관도 마찬가지다. 화장실에는 치킨 무 국물 냄새가 가득하고 적어도 변기 커버 하나에는 꼭 변이 묻어있다(적어도 은혜관 2층 화장실은 그랬다). 하지만 월요일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오석관과 생활관은 멀끔해진다. 그들의 부산한 노동 덕분이다.
무의식 중 우리는 청소 근로자들이 합당한 임금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는지도 모른다. 무의식은 행동을 통해 드러난다. 그들에게 빵과 우유를 가져다주고, 마주치면 머리를 꾸벅인다. 미화원이나 근로자라 부르기에는 뭔가 어색해 어머니를 덧붙인다. 총학생회는 노동을 거들기도 한다. 20년을 이어온 한동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변해선 안 됐는지도. 한동의 아름다운 풍경을 이어가기 위해선 말이다.
부끄럽다. 20년간 그들의 노동환경은 공론화되지 못했다. 총학생회에 의해서도, 교수에 의해서도, 학생에 의해서도, 심지어 신문사에 의해서도. 학교는 최저가낙찰제로 예산을 아낄 수 있었고 아껴진 예산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위해 쓰였을 것이다. 청소근로자들의 비자발적인 희생으로 우리는 보다 적은 돈을 내고 ‘고상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비자발적인 희생이라도 ‘희생’으로 우리를 돌봤다는 점에서 그들은 진정 우리의 어머니일지도 모른다. 아,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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