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끝냈다 지우고 다시 쓰길 벌써 네 번째다. 20주년을 맞은 학교와 처음으로 바뀐 총장. 더불어 편집국장이라는 지위가 주는 중압감이 글에 쓸데없는 멋만 늘리게 한다. 글을 쓰면 쓸수록 알게 된다. 난 이 학교를 분석하거나 비판할만한 새로운 언어를 구사하지 못한다. 분석과 비판의 메스를 골라 잡을 때마다 녹슬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난 구시대의 자식이다.
 
비민주적인 의사결정구조. 소통의 부재. 투표하지 않는 학생과 반영하지 않는 총학생회. 교육중심대학이라는 명목으로 연구 환경 조성에 인색한 학교와 과도한 업무부담으로 공부하지 못하는 교수들. 소시민적 기독교 세계관을 강요하는 학교와 받아들이는 학생들. ‘내 사랑 한동’이 쓰여진 지 20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 때와 지금의 학교는 다르지 않다. 비판하는 자들의 논리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의 글에 감탄하는 한편 모교와 나의 무력함이 슬프다. 개교 이래 같은 이야기와 논리만 반복된다. 학교도 학생의 비판을 예상할 수 있고 학생도 학교의 반응을 예상할 수 있다.
 
오래된 연인이 시시껄렁한 농담을 무의식 중에 던지듯, 비판과 분석도 인사치레처럼 오간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는지요. 귀하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만 이건 아닌 거 같네요.’ ‘예.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요. 그래서 이렇게 하려고요.’ ‘아, 역시나 군요.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예. 다음에도 부탁 드립니다.’ 비판하는 자들은 비판하는 것으로 자신의 소명을 다하며 제시하는 자들은 제시하는 것으로 자신의 소명을 끝낸다. 그리고 끝이다. 제 갈 길을 간다. 나중에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역사책은 구시대와 새시대를 구분한다. 구시대와 새시대 사이에는 언제나 혁명이 존재한다. 칼 포퍼는 급진적인 혁명이 가져오는 부작용이 긍정적인 효과보다 크다며 점진적인 개혁의 효용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혁명은 일으키고 싶어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일으킬 수 밖에 없어 일으키는 것이 혁명이다. 난 한동에서 혁명이라 부를만한 것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어떤 형식으로든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우리 모두 구시대의 자식이다.
 
신형철이 말했듯, 언론인은 ‘세상의 언어를 가지런히 하고 싶다는 욕망’을 지닌다. 그러나 구시대의 언론이 만들어내는 언어는 소란에 소란만을, 갈등에 갈등만을 더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눈에 뻔히 보이는 결점을 그냥 보고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알고 있다. 한동신문사가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음을.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눈에 띄는 당장의 작은 결점들을 해결하고자 분투할 수 밖에. 다시 생각해보니 칼 포퍼의 말이 맞는 듯하다. 점진적인 개혁만이 있을 뿐이다. 혁명이 있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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