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 뺏기고 뺏은 처참한 전투지, 포항





1953년 7월 27일 10시 1분. 유엔군사령부, 북한 인민군 총참모장, 북한군 최고사령관,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주한 유엔사령관은 북한이 만들어 놓은 임시목조건물에서 18개에 달하는 문서에 서명을 시작했다. 이로써 3년 동안 지속했던 한국전쟁은 마침내 휴전을 맞았다. 하지만 남한정부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은 채 한반도의 역사는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8월 11일, 목숨을바친 포항의 학도의용군


1950년 6월 25일새벽 4시경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이 일어난 지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북한에 의한 무력통일이 이뤄지는 듯했다. 유엔연합군은 시간을 벌기 위해 왜관, 영동, 마산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고 밀려오는 북한군에 의해방어선을 왜관, 기계, 포항으로 조정해야 했다. 이 방어선이 뚫리면 부산은 순식간에 점령될 것이 뻔하기에 반드시 목숨을 걸고 지켜야 했다.


나라를지키고자 전사한 군인 중에는 ‘학도의용군’이 있었다. 군번도 계급도 없이 오직 조국을 위해 일어난 학도의용군은 10대중반에서 20대 초반으로 이뤄진 학생들로 전국에서 약 5만명이 참전했다. 펜 대신 총을 들고 조국수호에 나서 꽃다운 나이에 산화한 이들은 국군 10개 사단에 편입돼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 공을 세웠다. 학도의용군이참가한 대표적인 전투로 1950년 8월 11일에 일어난 포항여중 전투가 있다. 학도병 단독 전투라고도 불리는이 전투에서 육군 제3사단 소속 71명의 학도의용군은 개인당 M-1 소총 한 자루와 실탄 200여 발, 그리고 약간의 수류탄만을 받은 채, 군의 지휘도 지원도 없이 홀로싸워야만 했다. 새벽 4시경 기습적으로 들이닥친 공격으로 71명의 학도의용군은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한 채 북한군 제5사단및 766유격 부대원과 목숨을 건 싸움을 펼쳤다. 당시 포항에는 3천여 명 정도의 국군밖에 남지 않았고 3사단 후방사령부에 있는 이 71명의 학도의용군만이 유일한 전투병력이었다. 11시간의 긴 사투끝에 결국 47명이 희생됐고 약 3,000명이던 북한군은 260여 명이 사망했다. 71명의 학도의용군이 목숨을 바쳐 북한군을막아 남쪽으로의 침공을 늦췄기에 20만 명의 피난민이 피할 수 있었고 제3사단 및 기타 지원부대 병력이 형산강 이남의 안전지대로 철수해 차기 전투에 이바지할 수 있었다. 포항여중 전투의 생존자 김만규(78) 씨는 “포항은 아홉 번이나 북한군이 침입했는데 처음으로 전투를 벌인 곳이 바로 이 포항여중이다”며 “지급된 실탄이 바닥나자 적이 던진 수류탄을 다시 던지는 혈전을벌였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 포항여중 전투는 2010년 개봉한 영화 ‘포화속으로’의배경이 됐다.






전쟁의 운명을 바꿔놓은 전투지 ‘포항’


포항은낙동강 최후 방어선으로 국토수호의 마지막 보루였기에 국군은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북한군은 ‘해방 5주년이 되는 1950년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겠다’는목표와 자신감으로 전쟁에 임했기에 낙동강 방어선에서 벌여졌던 전투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피의 전장이었다. 당시의낙동강 전선의 유엔군사령관은 “낙동강 전선의 마지막 보루인 포항이 점령되면 곧바로 유엔군을 철수시키겠다”고 말했다. 다행히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던 칠곡 다부동, 기계-안강, 영천지구, 포항전투 등에서 승기를 잡았고 국군과 유엔군의 승리로 낙동강 방어선 전투는 막을 내렸다. 이 전투로 전쟁의 판도는 수세에서 공세로 바뀌었으며 6.25전쟁의전세를 뒤엎을 수 있었다. 이윽고 맥아더 장군에 의한 인천상륙작전으로 전군이 북한을 향했고 포항지역에주둔해있던 제3사단 23연대가 38선을 넘을 때 가장 최고봉에 서는 공을 세웠다. 휴전선을 돌파한 1950년 10월 1일을기념하기 위해 국군의 날이 제정됐으며 포항은 승전보를 울린 시발지가 됐다. 최 씨는 “포항은 격전지중의 격전지였다”며 “방위전선의 사수는 물론 그 후의 반격에 크게 기여했다”고 말했다.

중요격전지였던 만큼 전쟁 당시 포항이 입은 피해는 상당했다. 일부 건물을 제외하곤 전부 쑥대밭이 됐으며, 가매장됐던 군인들의 시체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부패돼 있었다. 휴전후 60년이 지난 지금, 포항은 국내 주요 철강산업지로 우뚝서 경북 최고의 도시로 성장했다. 하지만 눈부신 발전 뒤엔 수 많은 사람들의 피와 희생이 있었다. 다가오는 10월 1일국군의 날에 조국을 구하기 위해 희생한 순국 선열들을 떠올려 보는 건 어떨까.



강초롱기자 kangcr@hgu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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