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지키고자 죽음과 맞섰던 그때 그 시절 학생들의 이야기




포항육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용흥동 탑산에 한 기념관이 포항 시가지를 바라보고 있다. 바로 한국전쟁 당시군번도 계급도 없이 산화한 학도의용군을 기리는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이다. 이 기념관에서 본 기자는 학도의용군 생존자분들을 만나 뵀다. 최기영어르신, 학도의용군 포항지회 김문목 회장님, 김만규 어르신은낙동강 최후의 방어선인 포항에서 전투를 치른 역사의 산 증인이셨다.

전쟁,그 끔찍한 기억


어르신들은중학교 재학 중 학도의용군으로 자진 입대했다. 김만규 어르신은 포항여중에서 11시간 사투 속에 목숨만은 건졌지만, 포로로 잡혀 수모의 날을 보내야했다. “새벽 3시쯤 포항 시내 쪽에서 따발총 소리가 나니사단 사령부를 사수하라며 학도의용군만 남긴 채 육군은 모두 후퇴해버렸습니다. 영화에서는 미화됐지만, 사실은 그때 중대장, 소대장 모두 학생들이었고 우린 제대로 된 훈련조차받지 못했어요. 47명 사망, 10명은 행방불명, 13명은 부상당한 채 포로가 됐어요. 영일군에 있는 ‘해방동무임시수용소’에서 10여일간 포로생활을 하다 탈출에 성공했지요” 김문목 회장님은 제3사단 25연대 소속으로 포항전투와 기계-안강전투에 참여했다. “전쟁이 일어나고 7월 15일날 대부분 학교가 폐쇄됐어. 포항전투 당시에 5개 연대가있었는데 일부 간부진을 제외하곤 전부 학생들이었지. 포항제일교회라고 알지? 딱 그 건물 하나만 남기고 주변은 전쟁으로 온통 쑥대밭이 됐어”라며당시를 회상했다. 우리학교 바로 뒤에 위치한 천마산에서도 북한군 제5사단과육군 제3사단의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다. 6번이나 고지를빼앗기고 빼앗는 혈투가 전개됐지만 개인 화기라고는 수류탄 몇 발이 전부였다. 최기영 어르신은 제3사단 23연대 소속으로 이 천마산96고지 전투에 참여했다. 최 어르신은 “전쟁기술없이 무작정 달려들었으니 우리 학도의용군은 총받이가 될 뿐이었지. 인사만 주고받은 학생들이 매일같이죽어나갔어. 이름도 모르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른 채 말이야”며“나도 천마산 전투에서 총알을 몇 발 맞았어. 2년 동안부산의 육군병원에서 고통스런 치료를 받아야 했고”라고 씁쓸한 웃음을 지은 채 말씀했다. 천마산 고지 밑에선 여전히 유해발굴사업이 진행 중이다. 학도의용군유해발굴사업은 최기영 어르신의 권유로 천마산에서 처음 시작됐다. 포항 양덕으로 내려가는 길목으로 매년발굴작업이 이뤄지고 있으며 발굴된 시신은 국립묘지에 안장된다. “한동대학교가 천마산 바로 옆에 있지? 그 곳이 얼마나 지옥 같았는지 학생들은 상상도 못 할거야. 그 곳에서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는데 정작 한동대 학생들은 천마산이 어땠는지 전혀 모르니 안타까울 뿐이야”

영령들이 봉안된 성스러운 장소


철모도, 계급도, 군번도 없던 자들을 위해 지어진 국내유일의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 최기영 어르신이 이 기념관의 초대 대표로 계셨고, 현재 김문목 회장님이제3대 대표를 지내고 계신다. 최기영 어르신은 “30여 년간 정부에 기념관 건립을 요청했고 전두환 대통령 때 국무총리였던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덕분에 기념관을지을 수 있었다”라고 말씀했다. 어린 학생들의 넋을 기리기위해 박 총리가 기념의 당위성을 주장했고 포항자치단체의 기부 등으로 건립, 개관하게 됐다. 올해 개관 10주년을 맞은 기념관에서 최기영 어르신은 “이 기념관을 지으려고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몰라. 이 탑산 밑에 혼자시위하고 그랬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 뒤 쪽의 계단을 올라가보면 ‘포항지구 전적비’와‘전몰학도 충혼탑’을 볼 수 있다. 김만규 어르신이 이 두 개의 비석과 탑을 세우기 위해 수년간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포항지구 전적비는 육군 제3사단,경찰, 학도의용군 등으로 이뤄진 국군과 유엔군이 연합작전을 펼친 전투를 기념하고, 전사한 군인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1979년 12월 30일에 세워진 비석으로 비석의 모양에는 각각 의미가 담겨있다. 세 계의 계단은 육군 제3사단을, 오른쪽 동상은 정규군을, 왼쪽 교복을 입은 동상은 학도의용군을, 이 머리 위의 다섯 개의 살은 북한군 5사단을, 살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선은 북한군을 포항에 묶어놨단 것을 의미한다. 비석뒤로 또 하나의 탑을 찾을 수 있다. 포항지구 전투에서 산화한 1,394인의전몰학도를 봉안하고 고인들의 영령을 위로코자 1957년 8월 11일, 전국 학도호국단에서 건립한 전몰학도 충혼탑. 전몰학도 충혼탑은 순국하신 전몰학도가 죽음으로 지켜내고자 했던 이 포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잊지 말아야 할 역사


한국전쟁에대해 잘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에 관해 여쭤봤을 때 어르신들은 말씀하셨다. “우리나라는 안보불감증이심각해. 국가적 안보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니 젊은이들은 전쟁에 대해 너무 안일하지” 김문목 회장님은 “전쟁 당시2,000만 국민들은 나 하나 희생돼도 국가를 구하겠다는 의무감이 있었어. 요즘 아이들을제대로 교육하지 않은 어른들의 책임이 큰 것 같아”라고 말씀하셨다. 김만규어르신은 “나라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중동지역사람들을 보세요. 나라가 없다는 것은 비참한 것입니다. 우리는이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고 강건히 말씀하셨다. 최기영 어르신은“전쟁 중에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군지 아나? 바로 전쟁고아야. 10만 명의 전쟁고아들이 스위스, 덴마크, 네덜란드로 입양됐는데 80이 넘도록 자신의 출생지, 이름, 부모를 모른 채 살아왔어.이런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선 안돼”라며 전쟁고아의 사진을 안타깝게 바라보셨다.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여쭤봤을 때 최기영 어르신은 말씀하셨다. “군인후보생들의안보교육을 할 때 그들에게 물어보지. ‘전쟁에 참여한 적이 있는가? 전쟁중 죽음을 눈 앞에 둔다면 무슨 말이 나올 것 같나’ 그러면 후보생은 이렇게 얘기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겠습니다’ 내가 수 많은 전우를 잃어봤지만그들이 마지막에 외치는 말은 다 같았네. ‘어머니’. 효도를하시게. 효도를 한다면 나라에 대한 충성심은 자연히 우러나올 테니” 말씀을끝내시면서 어르신은 ‘이우근’ 소년의 편지를 조용히 바라보셨다.



강초롱기자 kangcr@hgu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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