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은 네 척의 배를 이끌고 일본 동경만에 도착한다. 도쿠가와 막부가 개항을 거부하자 페리 제독은 동경만을 무차별 폭격했고, 500명의 사망자가 나온 뒤에서야 막부는 미국 미일수호조규를 맺으며 치욕적인 문호 개방을 하게 된다. 이후 서양 외세에 의한 경제적 침탈이 가속화 되면서, 막부는 일본 내 무사와 서민 모두에게 적극적인 저항을 받는다. (심지어 막부의 대로(大老)였던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까지 거리에서 처참히 암살당한다) 결국 무능력한 도쿠가와 막부는 무너지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사이고 쥬도(西??道)등의 주도로 존왕양이 (尊王攘夷, 왕을 받들고, 양이를 거부한다)를 내세운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시대가 열린다.

일본위기설, “군대가 필요하다!”

그러나 메이지 정권은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한다. 양이(洋夷)가 메이지정권의 명분이었지만, 현실적으로 강력한 외세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 지도자들은 국제현실을 일반 백성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핵심은 ‘일본 위기설’이었다. “강력한 서방세력이 아시아를 지배하기 위해 몰려오고 있다. 이들을 알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가 그들의 주장이었다. 이 가운데 러시아가 1861년 쓰시마 섬 점거를 시도하며 일본 본토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자, 일본 위기설은 힘을 얻게 된다.

일본은 이후 통일된 여론에 힘입어 개혁정책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된다. 특히 무엇보다 국방 분야의 개혁이 가장 중대한 것으로 여겨진다. 많은 언론들도 국방 개혁의 필요성에 동조하며 여론을 조성하기에 이르렀고, 이는 신일본의 병비 확장을 이끌어 낸다. 1880년 11월 참모본부장 야마가타 아리모토(山縣有朋)는 천황에게 바치는 ‘인방병비략표’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 하고 있다. “대저 수호조규가 있어 교제의 체결을 기할 수 있고, 만국공법이 있어 대립상태의 곡직을 판별하여 이로 인해 스스로 지킬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강자가 명의를 가장하여 사리를 영위하고 약자는 구실로 삼아 애정을 호소하는 도구가 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군대가 강할 때 국민은 비로소 자유를 말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후 ‘인방방비략표’의 취지가 정책적으로 채택되면서, 일본 군비는 14년 동안 전체 예산의 2%에서 32%까지 급속도로 증가했다.

이제는 밖으로

이후 어느 정도 자국 군력이 확보되자, 일본은 주변국가에 대해 군사적 간섭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1890년 당시 수상이었던 야마가타는 그의 저서 <외교정략론>에서 이익선론이라는 이론을 들며, 일본의 안보를 위해서는 인국(隣國)에 대한 적극적인 간섭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저서에서 그는 “이익선이란 주권선의 안전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접지역을 말하며, 일본의 독립과 자위를 위해서는 이익선의 방호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있어 이익선의 초점은 실로 조선에 있다. (중략) 만약 이익선에 대한 전망이 불리해 진다면 무력행사를 통해서라도 이를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가운데, 초기 정권에서 축출됐던 몇몇 정한론자들이 다시 내각에 흡수되면서 이익선론은 더욱 힘을 얻게 된다. 이 때부터 일본은 공식적으로 안보를 다루는데 있어, 자국영토만을 고려하는 것을 넘어 자국의 이익과 관련된 인국들의 군사, 정치, 외교관계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게 된다. 국제정세가 그들의 이해관계와 반대로 진행된다면 언제든지 군사력을 행사해 강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들의 군사력이 행사되는’ 주 장소는 바로 조선이었다.

조선으로, 조선으로

당시 조선이 일본의 이익선의 핵심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청과 러시아는 일본에게 매우 성가신 존재였다. 특히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서 세력을 넓히는 청은 목전의 위기였다. 상황 타개를 위해, 동학농민 운동을 진압한 일본은 철군하지 않고 경복궁을 점거한 뒤 조선을 근대화하겠다고 선언한다. 이에 청이 지나친 내정간섭이라며 반대하자, 일본 여론은 동양 평화를 위해 조선개혁을 추진하는 일본과 그것을 거절하는 청국이라는 스토리를 만들어 청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조성한다. 후쿠자와 유키치(澤福諭吉)는 지지신보에서 청일전쟁에 대해 “문명개화를 꾀하는 세력(일본)과 그 진보를 방해하는 세력(청)과의 전쟁’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서서히 일본 내에서는 ‘조선 침략 전쟁의 의의 만들기’가 서서히 진행 된다.

이후 일본은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지만 러시아의 외교적 방해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다. 또한 민씨정권이 친러(親老)로 돌아서자 결국 러시아가 조선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조성된다. 이때부터 일본 내에서는 조선을 중립국화 하는 것보다 오히려 조선을 직접 통치하는 쪽이 일본 안보에 더욱 긍정적일 수 있다는 의견이 노골적으로 제기된다. 결국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4년 5월 소집된 내각회의에서 ‘일본이 조선의 국내외적 안정에 대해 직접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른다. 이듬해인 1905년 일본은 을사조약을 통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해 조선 내정에 직접적으로 간섭하게 된다. 1909년 조선 합병에 부정적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까지 합병 찬성으로 돌아서면서, 일본의 조선합병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 후쿠자와 유키치 : 일본 계몽가이자 교육가로 일찍이 실학과 부국강병을 강조하여 일본내 자본주의 발달의 사상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개혁파 유길준의 스승이기도 하다.

* 정한론 : 1870년대 일본 정계에서 대두된 한국에 대한 공략론을 말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한론자들은 정계에서 축출당하고 일본 민권운동으로 흡수된다.

김지승 기자 kimjs@hg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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