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통해 드러난 그 치밀했던 계획

올해로부터 100년 전 8월 29일은 한일병합조약이 반포(頒布)된 날이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전락시킨 이 조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세계열강과의 치밀한 장기 외교전을 계획적으로 준비한다.

시모노세키조약(1895년 4월 17일)

일본이 청일전쟁에 승리한 후, 이토 히로부미와 청국 리훙장 사이에서 강화조약으로 체결됐다. 총 5개의 항목으로 구성된 본 조약은 청나라의 조선간섭을 물리치고, 일본이 조선뿐만 아니라 청 영토 일부까지 지배력을 뻗칠 수 있게 했다.

제1조 ‘조선이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한다’. 조선 땅에서 벌어진 전쟁의 마무리를 위한 것이었고, 이후 조선의 운명을 좌우하는 조약이었지만 조선 대표나 관계자는 참여하지 못했다. 본 조약은 청국의 세력에서 조선을 떼어내,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일본의 첫 번째 계략이었다.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을 위한 회담 장면을 그린 일본 전통회화/ 일조각 제공


영일동맹(1902년 1월 30일)

영국 런던에서 랜스다운 외무장관과 하야시 다다스 주영공사가 각국의 대표로서 체결한 동맹이다. 본 동맹은 러시아의 만주와 한반도로의 세력확장을 방어하고, 영국과 일본이 동아시아 이권을 함께 나누려는 목적이었다. 영국은 청에서, 일본은 대한제국에서의 이익을 인정하는 상호 제국주의 정책을 지원ㆍ보완하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본 조약을 통해 영국뿐만 아니라, 영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던 프랑스를 포함한 다른 서구 열강들도 한반도에서 일본의 우월한 지위를 인정하게 됐다. 또한 일본은 당시 강대국인 영국과의 동맹을 통해 단번에 서구열강과 같은 지위에 오르게 됐다.

이후 2차 영일동맹(1905년 8월 12일)을 통해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지도감독과 통제 및 보호권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영일동맹을 풍자한 당시 일러스트레이션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 7월 29일)

일본의 총리 가쓰라 다로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특사인 육군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 도쿄에서 맺은 비밀협정이다. 당시 러시아와 전쟁(러일전쟁, 1904년) 중이던 일본은 전쟁의 승기를 잡고 있었으나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여력이 바닥난 상태였고, 전쟁을 종결시킬 외교적 협상 구도를 모색하고 있었다. 이 밀약을 통해 미국과 일본은 양국의 우의와 이해관계를 확인하게 되며 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대한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것을 미국이 승인하게 된다.

이 밀약이 두 사람이 나눈 대화기록이라는 일부 주장이 있으나 한국의 국제정치상 위상과 존립에 관해 미국과 일본의 고위층 사이에 합의된 의견이 교환되고 상호 확인됐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왼쪽)과 가쓰라 다로(오른쪽)


포츠머스조약(1905년 9월 5일)

러일전쟁을 끝내는 의미로서 양국의 전권대사 사이에서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은 미국의 중재로 이뤄졌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대한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것을 승인한 미국의 중재는 편향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 조약을 통해 러시아는 대한제국에 있어서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하게 된다. 또한 일본은 비망록에 기록된 '일본이 한국 정부의 승인하에 정치적으로 간섭할 수 있다'는 내용을 통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한국 정부의 승인만 얻어내면 한국을 점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보해뒀다.

한편, 미국은 본 조약에 대해서 사전에 독일과도 의견을 조율해놓은 상태였다. 따라서 포츠머스 조약은 일본과 러시아와의 강화조약이었지만, 사실상 일본이 한국을 점령할 방법이 있음을 공식적으로 승인받은 약조문이나 다름없었다.

포츠머스 조약 체결을 위한 회담 장면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로 통치권을 넘겨야 했던 날, 찬란했던 조선왕조는 건국 519년 만에 식민지로 전락해 버렸다. 치밀한 계획에 따른 국제적인 조약 체결로 조선에서의 독점적 권리를 인정받은 일본에게 영국, 러시아, 독일 등의 세계열강들도 강제병합조약 체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김민 기자 kimmin@hgu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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