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리풀꽃―여름에서 가을까지, 시궁창이라고 말하는 곳에 피어나는 풀꽃이다.

키 작은 이 풀꽃을 보려면 허리를 굽혀야 한다. 아예 주저앉아야 한다. 자기 높이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 풀꽃을 보기란 어렵다. 그래서 자기 높이를 뻣뻣하게 고집하는 사람들은 이 풀꽃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이 풀꽃은 조그맣다. 앉은 자세로도 부족해 꽃을 향해 자기 몸을 바짝 들이대고 꽃에 한참 눈을 주어야 이 초롱초롱한 꽃망울을 제대로 볼 수 있다. 풀꽃 하나 보기 위해서 자기 높이를 포기하고, 다시 얼굴을 바짝 들이대야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어느 날 털썩 몸이 주저앉았던 슬픔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 고마리풀꽃을 아는 경우가 많다.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리다가 이 풀꽃과 만났던 것일까? 털썩 주저앉은 그 추락보다 더 낮은 곳에 피어 있는 이 풀꽃을 보며 그 슬픔과 절망은 위안을 받았?까?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이름초자 몰라도 시궁창 속에서 피어나는 이 풀꽃에게서.

명문과 명품과 휘황찬란한 높이만 숭상하는 바벨탑-주의(ism) 세상에서 왜 조물주가 이리도 작은 풀꽃을 만들었는지 명상하게 하는 풀꽃.

무소유(無所有)―머리로는 금방 알지만, 몸으로 따르기는 어려운 말이다.

자신을 좁쌀 한 알보다 작은 존재라고 생각해 호(號)도 일속자(一粟者)라고 쓴 장일순 선생은 무소유를 이렇게 말했다.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면 거기에 다 있데요.”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은 모두 무소유의 실천자이겠지만, 우리가 흔히 보는 나무 중에서 하나를 꼽으라면 은행나무이다.

열매도 모두 남에게 주고 가을 하늘 아래 선 은행나무. 베짱이보다 개미처럼 좀 챙겨야 미덕(美德)인 황량한 겨울의 문턱에서, 오히려 잎과 줄기를 연결하는 통로를 막아 줄기로부터 올라오는 영양분과 수분을 차단하고, 잎에 있는 나머지 녹말마저도 허공에 다 주고 노란 잎으로 펄럭이다가 바람에 생명의 끈까지 놓아버리는 성자(聖者).

자기 몫을 챙기려고 뛰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경쟁에 처졌거나 경쟁을 포기한 사람의 손에만 올려지는 노란 손수건.

이 가을에 희망은 다 차지하려는 욕심에 있지 않다고, 수백 수천의 노란 손수건으로 매달려 우리에게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면 거기에 다 있음’을 보여주는 나무.

가진 것도 부족해 평화를 내세워 남의 것을 빼앗고 죽이는 나라들과 사람들과 세상 속에서 수천의 노란 손수건을 흔들며 우리가 가진 것을 다시 헤아려보게 하는 나무.

다 버리고 낮추어야 행복하다는, 이 가을 풀꽃과 나무의 오체투지(五體投地)―목에 힘 좀 빼고 살라는 일침(一針).

서호필 (한빛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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