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이용하다보면 종종 민망스런 광경들이 연출되곤 한다. 그 중에 하나가 ‘자리양보’를 둘러싼 갈등인데, 대개 연세 많으신 어른(사실 대중교통을 이용하시는 분들은 어느 정도 거동이 가능한 중년 이상의 분들이 대부분이다)께서 어린 학생 앞에서 불호령을 내리시곤 하는 모습이 그것이다. 노인에겐 응당 즉각 자리양보를 해야 마땅하거늘 “요즘 젊은 것들은 도무지 싸가지가 없어서” 양보를 안 한다는 것이다. 일상 속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이런 상황은 따져 봄직한 많은 함의(含意)들이 널려 있다. 과연 나이(연령)는 권력인가? 연장자는 연하자에게 양보를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가? 젊은이는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떤 조건에서든 어른들에게 복종하여야 하는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어느 광고카피의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단지 나이만을 기준으로 권력관계가 형성된다면 적어도 이는 근대적인 사회규범이라고 볼 수는 없다. 물론 경로효친(敬老孝親)은 우리의 오랜 관습이다. 이런 관습이 봉건적인 것이어서 폐기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게 아니다. 관습이란 그것이 합리적이든 그렇지 않든 현실의 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권위와 규정력을 갖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관습이 곧 의무적인 강제력을 수반하는 규범이라고 한다면 큰 착각이다. 관습은 현실의 컨텍스트(context)여서 그것이 자율의 영역에서든, 타율의 영역에서든 하나의 규범적 기준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관습은 권위를 동반할 때 비로소 그 사회적 실효성이 확보된다. 권위와 권력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어서, 권위는 자율성을 전제로 작동하는데 반해 권력은 타율성을 전제로 한다. 예컨대 “스승을 존경하지 않는 자는 징역 3년에 처한다”고 한다면 얼마나 웃기는 일이 될 것인가. 섬김과 배려, 존경은 자발적 ‘권면(勸勉)’사항이지 강제적 의무사항은 아니라는 것이다. 건강한 젊은이가 노약자에게 자기만을 생각해서 자리양보를 안하면, 통상적으로 ‘버릇없는 젊은이’로 여겨지기 마련이고, 이에 따라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비난을 면치 못한다. 경로(敬老)라는 통상의 관습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이게 관습의 힘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그것일 뿐이다. 여기에 그 이상의 강제력과 벌칙을 가하는 것은, ‘권위’가 권력화 하면서 관습이 폭력적으로 관철되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재단(裁斷)할 한 문제는 아니지만, 사회에는 지켜야 할 규범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것은 사안에 따라 때로는 자율적으로, 때로는 타율적으로 운영된다. 엄밀하게 보자면 ‘양보’란 자율성에 기초한 자발적인 규범으로서 우리가 소중히 가꾸어야 할 아름다운 미덕이다. 그래서 너무도 당연한 이치이지만, 양보란 원칙적으로 양보하는 사람의 몫이고, 그 양보로 인해 수혜를 받는 대상으로서는 감사의 예를 표하는 것이 마땅하다. 타율에 근거해서 양보가 강제적으로 실현된들 자발적 공경심과 양보의 미덕에 근거한 ‘노인의 권위’가 과연 어디에 설 자리가 있겠는가. 사회가 민주화 되고 인권이 신장되면서 너무나 당연시 되던 기존의 질서에 ‘인권 감수성’은 꼬치꼬치 물음을 던지고 있다. 이것은 해체의 위기징조일까, 전도된 가치들이 제자리를 찾는 새로운 기회일까.

김형완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상담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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